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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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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 ※ 인물은 시대순으로 나열하였습니다.

왕규(王規) [?~945] : 광주지방의 호족

  • 광주지방의 호족 출신으로 고려 초기의 재신이다. 그는 대조 왕건을 받들어 벼슬이 대광에 이르렀다. 그리고, 937년 사신으로 진나라에 가서 황제의 등극을 축하하기도 하였다.
    왕규의 두 딸은 태조의 제 15비 광주원부인과, 광주원군을 낳은 제 16비 소광주원부인이 되었는데, 그는 왕실의 외척으로서 또한 광주의 강력한 지방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막강한 정치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염상 · 박수문과 함께 태조의 임종을 곁에서 지킨 세 재신 중 의 한 사람일 정도로 대조의 신임을 받았으며, 당시 세력을 떨쳤던 것으로 보인다.
    또 태조가 죽자 그 유명을 내외에 선포하는 중책을 맡기도 하였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이세화(李世華)?~1238년: 몽고 침입 때 광주성을 지켜냄

  • 이세화는 진주출신으로, 아버지는 검교대장군이었고, 어머니는 해양군부인 김씨였다. 그는 1198년 성균관시에 합격하였고, 1202년(신종5)에 춘장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견주목사가 되었고, 1216년(고종3)에는 도병마녹사가 되었다. 1220년(고종7)에는 백령진장이 되었는데 이때 이 곳에는 향교가 없었는데 이세화가 자제들을 모아 가르치게 하여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중서주서, 전중시어사, 남원부사, 경상주도안렴사 등을 거쳤다. 이세화는 1232년(고종19)에 예빈소경 어서잡단이 되었는데, 이해 여름 국가가 몽고의 침략으로 인해 도읍을 옮기려 하였다. 광주는 중도의 큰 진 이어서 조정에서 논의하고 간택하여 이세화를 책임자로 파견하였다. 이 해 11월에 몽고 대병이 와서 수십 겹으로 포위하고 온갖 계략으로 공격하기를 수개월에 이르렀다. 그는 밤낮으로 수리하고 지키고 대비하였으며 임기응변으로 의표를 찔러 적을 사로잡거나 죽인 것이 심히 많으니 오랑캐가 불가함을 알고 드디어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광주를 지킨 공으로 1235년(고종22)에 조산대부 예부시랑, 우간의대부, 보문각직학사 지제고가 되었고, 이후 이부시랑, 간의 대부가 되었다. 1237년(고종24)에는 청주산성을 지키고 있어서 몽고군이 함락하지 못하였고, 그 해 겨울에 조의대부 사재경, 간의대부가 되었다가 그 다음해인 1238녀(고종25)에 죽었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안지상(安止常)생몰년 [미상] : 광주안씨

  • 안지상은 본관이 광주인데, 안길상 또는 안길상으로도 불리웠다. 그는 박수의 사위이자 박상충의 매부였다. 한편, 박상충은 박수의 아들이면서 이곡의 사위인데 고려 말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학자이다. 안지상은 충목왕 즉위년(1344)에 을과 2등으로 급제하였다. 충목왕 때 개혁을 담당한 정치도감의 녹사로 활동한다. 안렴사가 정동행성의 이문 윤계종이 이천 향리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보고를 올렸다. 그런데 안지상은 윤계종의 은혜를 입은 적이 있어 은폐하였다가 정치도감의 판사인 왕후와 김영돈에게 뺨을 얻어맞고 쫓겨났다. 충정왕의 공부를 돕는 시학으로 활동했던 전교승 안지상은 충정왕이 숙부 공민왕에 의해 쫓겨나 강화도로 향하자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가 하직인사를 올렸다. 이러한 사례들은 그가 은혜를 저버리지 않고 의리를 중시한 인물이었음을 말해준다. 이후 안지상은 고향 광주로 돌아와 은거한 것으로 보이는데, 공민왕 22년 경에 하을지에게 보낸 시에 그의 불우한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이로 보아 안지상은 공민왕 치세 내내 관직에서 소외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안지상은 우왕이 즉위한 후 관직에 복귀하였으며 우왕 3년 6월에 정3품인 판전객시사로서 왜구를 근절시키기를 요구하는 임무를 띠고 일본에 파견되었다. 하지만 그는 우왕 6년 11월에 병으로 그만 머나먼 타국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처럼 충목왕 때 아원으로 급제하여 우황 때까지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낸 안지상은 광주가 본관이고 여기에 촌장을 갖고 있었다. 안지상은 차남인 박상충의 아들 박은이 강동 지역에 묻힌 것으로 보아 출신지가 광주 중에서도 강동 지역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안지상은 그 가족관계에 대해서 부친이 안생이라는 점 정도밖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러한 정황들로 보아 앞에서 소개한 안성집안과 친척 관계였으리라 여겨진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이집(李集) [1314년~1387년] : 구암서원에 비향,둔촌이라는 지명의 유래

  • 이집의 초명은 원령이고, 자는 호연이며, 호는 둔촌이다. 그는 고려 말기의 학자 ·문인으로, 본관은 광주이고, 광주향리 이당의 아들이다. 이집은 충목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문장을 잘 짓고 지조가 굳고, 천성이 강직하기로 이름이 났다. 한편 그가 천녕현의 전야에 묻혀 살 때 『시편신립』에 대한 질문서를 정몽주에게 보내어 문사들을 경탄케 하였다. 그의 시에는 꾸밈과 우회보다는 직서체에 의한 자연스럽고 평이한 작품이 많다. 그는 당시 임심문을 비롯한 60명에 달하는 많은 인물들과 시로써 교유하였다. 특히, 이색 · 정몽주 · 이숭인과의 친분이 두터웠는데, 그의 문집 부록에 실린 삼은의 기 · 서 · 서는 그와 삼은과의 관계를 잘 알 수 있게 해준다. 강동구의 구암서원에 재향되었으며, 저서에『둔촌유고』가 있다. 둔촌은 그의 자손에게 가훈으로 이르기를
  • 독서는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하느리라
    시간을 아껴서 부지런히 공부하라
    늙어서 무능하면 공연히 후회만 하게 되는니
    머리맡의 세월은 멈추지 않고 쏜살같이 흐르도다
    자손에게 금을 강주리로 준다해도
    경서 한권 가르치는 것만 못하니라
    이 말은 비록 쉬운 말이나
    너희들을 위해서 간곡이 일러둔다.
  • 고 가르치니, 오늘날에도 광주 이씨의 정훈으로 받들어지고 잇다. 현재 강동구 둔촌동이라는 지명도 둔촌 이집이 이 지역에 은거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생겨났으며, 둔촌동 뒤의 ‘굴바위’와 ‘둔굴’은 그가 은거했던 곳이라 한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오사충(吳思忠) [1327년~1406년] : 묘가 강동구 지역에 있음

  • 오사충의 초명은 사정이고, 시호는 공회이다. 그는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영원 오씨의 시조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간의대부 오순이다. 오사충은 1355년(공민왕4) 문과에 급제하여 감찰규정, 헌납, 집의를 역임하고, 1389년(창왕1)에는 좌사의대부로서 사전의 폐단을 상소하였다. 이 해 공양왕이 즉위하자. 사인 조박 등과 함께 상소하여 우황과 창왕을 폐하여 서인을 만든 것을 주장하고, 이색·조민수·이인임이 우왕 · 창왕을 옹립한 것을 탄핵하였다. 이와 같은 과격한 상소를 인하여 한때 관직을 삭탈당하였으나, 다시 복직되어 대사성을 거쳐 판전교시사가 되었다. 1392녀(공양왕4) 정몽주가 이성계 일파를 몰아내려 할 때 그도 삭직되어 유배되었으나. 정몽주가 살해되자 풀려나와 좌상시가 되었다. 이 해 이성계 추대에 참여하여 개국공신 3등으로 호조전서가 되고 영성군에 봉해졌다. 1394년 중추원부사에 오르고, 교주강릉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정도전 · 남은 등과 가까운 수령·군인들이 직책을 소홀히 하거나 차례를 뛰어넘어 승진한 것을 엄하게 조사, 처리하였다. 1395년에 상의중추원사가 되고, 이듬해 정당문학, 경기좌도관찰사가 되었으며, 1404년(태조4)판사평부사에 이르렀다. 오사충의 묘가 강동구지역에 있는데 원래 오사충의 선대는 경상도 영일에 살다가 평안도 영원진으로 옮겼다. 그는 정도전과 같은 계열의 급진파로서 이색과 정몽주를 비판하는데 앞장 선 인물이었다. 그는 공민왕 4년 2얼 이공수와 안보 밑에서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이집과 동년이었는데, 그가 광주 지역에 묻힌 연유가 이와 관계가 잇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알 수 없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이양중(李養中) [1327년~1406년] : 묘가 강동구 지역에 있음

  • 고려 문신으로 자는 자정이고, 호는 석탄이며, 본관은 광주이다. 그는 공민왕 대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 우참의에 올랐으며 강직한 충절로 이름이 높았다. 이양중과 태종의 사이에 일화가 한가지 전한다. 태종 직접 이양중이 은거해 있던 수리골로 행행하여 이양중과 만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양중의 동생인 이양몽은 태종이 온다고 하자, 태종이 도착하기 전에 광주 원적산 아래로 피하였다고 한다. 이때 이양중이 홀로 야인 차림으로 왕을 접대함에 탁주를 따라 권하고 자기는 거문고를 타니 왕과 신하의 예는 전혀 없고 한낱 필부들의 모습 그대로인지라 수행했던 신하들이 대노하여 왕을 능멸하는 역신이니 죽여야 한다고 소리쳤다. 태종이 큰 소리로 제지하고 “이 분은 진정 나의 벗이다”하면서 한성판윤을 제수하고 출사할 것을 간곡히 권유했으나 그의 굳은 의지를 돌리지 못하고, 그 아이들의 우생에게 대신 벼슬을 주어 격려하고 환궁하였다. 일찍이 왕이 찾았다가 만나지 못하고 유숙하고 돌아갔다고 하여 그곳을 가리켜 왕숙탄이라 하였다. 그리고 석탄의 높은 지조를 찬양하며 사는 곳을 고덕리라 명명하도록 하여 지금의 고덕도의 유래가 되었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함부림(咸傅霖) [1360년~1410년] : 묘가 고덕중학교 운동장 자리에 있었음

  • 함부림의 자는 윤물이고 호는 난계이며, 시호는 정평이다. 그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강릉이며, 검교중추원학사 함승경의 아들이다. 함부림은 1385년(우황11) 문가에 급제하여 예문검열을 거쳐 좌정언으로 승진하였다. 1389년 공양왕이 즉위하자 헌납으로 승진하여 정지 · 이림 · 왕안덕 · 우인열 · 우홍수 등을 탄핵하다가 황의 미움을 받아 춘주지사로 좌천되었으나 다시 부름을 받아 형조정랑이 되었다. 이때 중방의 무신들이 문신을 멸시하자 이에 항거하다가 파직되었다. 1392년 (공양왕4) 이성계가 실권을 잡자 병조정랑 겸 도평의사사 경력사 도사에 복직되었다. 이 해 이성계 추대에 참여하여 개국공신 3등으로 개성소윤에 임명되었다. 그 뒤 형조의랑에 이어대사성, 좌산기상시 겸상서소윤을 겸하고 명성군에 봉하여졌다. 태종 토기에 충청도도관찰척사, 예문과 제학, 동북면도순문사, 동북면도순문찰리사 겸 병마도절제사 겸영흥부윤 등을 거쳐, 1404년(태종4) 참지의정부사로서 대사헌에 올랐다. 다음해 노비변정도감제조와 경기도도관찰사를 지내고,1406년에 계림부윤, 경상도도관찰출척사를 거쳐, 다음해 다시 참지의정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5년 앞서 1395년(태조7)의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과 함께 왕자 방석을 옹립하였다는 혐의로 탄핵을 받았었다. 1408년 형조판서가 되고, 병으로 물러난 뒤 경기·충청·경상·전라·황해 등 각 도의 도관찰출척사, 동북면도순문찰리사를 지내고, 1410년 파직되었다. 성격이 강직하여 직언을 잘하였으며, 이치에 능숙하여 관직을 맡을 때마나 칭송을 받았다. 함부림의 묘는 원래 고덕중학교 운동장 자리에 있었으나, 1982년 서울특별시 시세확장에 수반하여 이천시 호법면 안평리 산 105번지로 이장하였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안성(安省) [?~1421년] : 공주안씨

  • 안성의 초명은 소목이고, 자는 일삼이며 호는 설천·천곡, 시호는 사간이다. 그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주이다. 안성은 고려 우왕 초 진사에 합격하고, 1380년(우왕6) 문과에 급제하여 보문각 직학사를 거쳐 상주판관이 되어 청렴한 이름을 떨쳤다. 조선 개국후, 1393년(태조2) 청백리에 뽑혀 송경유후에 임명되었을 때, ‘내가 대대로 고령에 벼슬한 가문으로서 어찌 다은 사람의 산하가 되어 송경에 가서 조상의 영혼을 대하라?’ 하고 궁전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며 통곡하니, 태조가 이 사람을 죽이면 후세에 충성하는 선비가 없어진다. 하고 죽이려는 좌우를 제제하고 그를 급히 붙들어 내보냈다 한다. 1396년 봉상시 소경으로서 현비의 시호를 잘못 지어 축산에 유배되고, 1400년(정종20 중승을 거쳐 지보주사가 되었다. 1411년(태종11) 참지의정부사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강원도도관찰사가 되었으며, 벼슬이 참찬에 이르고 평양백에 봉해졌으며, 뒤에 장수의 창계서원에 제향되었다. 그런데,『기우집』에는 조선왕조 개창에 반대해 절개를 지킨 두문동 72현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 안성도 포함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안성은 관직이 직제학이었는데 태조 이성계가 평양백에 임명하였지만 받지 않았다고 한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유창(劉敞) [?~1421년] : 상일동에 묘와 신도비가 있음

  • 유창의 초명은 경이고 자는 맹의, 호는 선암이며, 시호는 문희이다. 그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개국공신으로, 강릉 유씨의 시조이다. 그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개국공신으로, 강릉 유씨의 시조이다. 그는 강릉부 우계현 출신으로, 지군사 유천봉의 아들이며 이집의 사위이다. 유창은 1371년(공민왕20) 이색과 전록생 밑에서 국왕의 친시에 급제하여, 성균학유가 되고, 박사와 문하주서를 역임하였다. 1375년(우왕1) 통례문지후가 되고, 전공좌랑, 예의정랑, 분부정랑을 거쳐,1389년(공양왕1) 성균사예, 이어 호조의랑, 성균제주를 역임하였다. 1392년 7월 태조가 조선을 세울 때 공을 세워 개국 공신 2등으로 성균관대사성이 되고, 이어 좌산기상시로 천직하였다. 1939년(태조2) 중추원좌부승지가 되고, 다음해 중추원부사를 지내고 옥성군에 봉하여졌으며, 첨서중추원사가 되었다. 1401년(태종1) 승녕부윤으로 소요산에 들어간 태조를 찾아가 귀경을 권유하였으며, 예문관 대제학, 세자우부빈객 등을 역임하였다. 1408년 참지의정부사로 태조가 죽자 수묘관이 되어 3년 간 능을 지켰다. 1410년 길주 도찰리사로 나갔다가 참찬의정부사, 판공안부사 등을 지낸 뒤1413년 세자이사가 되고, 1416년 옥천부원군에 진봉되었으며 1421년(세종3) 궤장을 하사받았다. 이성계와 일찍부터 사귀어 그에게 경사를 강론하였으며, 특히 송나라 진덕수의『대학연의』를 즐겨 강론하여 세도를 만회할 뜻을 품게 하였다. 개국 후에도 대사성에 있으면서『대학연의』를 여러 차례 진강하였다. 1393년에 좌산기상시로 있으면서 사직하여 선술을 공부하겠다고 요청하자, 태조는 “선을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군부를 버리는데, 그대가 나를 버리면 불충이 되고, 어버이를 버리면 불효가 될 것이다. 그대가 선을 배우고자 하는 뜻이 무엇인가?”하고 만류하였다. 그는 성격이 온유돈후하고, 언행이 근독하며, 지위가 높을수록 마음이 겸손하여 사람들이 당나라의 누사덕에 비유하였다. 저서로는『선암집』이 있다. 현재 유창의 묘는 강동구 상일동 188번지에 있으며, 여기에 유창신도비도 있으며, 그 자손의 묘도 함께 있다. 그는 위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바로 이집의 사위였다. 이집과 절친한 이색이 그의 문생인 유창을 이집에게 사윗감으로 추천했지 않았나 싶다. 유창은 원래 강릉 사람이지만 처가의 마을에 뼈를 묻은 것이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박은(朴恩) [1370년~1422년] : 묘가 강동구 지역에 있음

  • 박은의 자는 앙지이고, 호는 조은이며, 시호는 평도이다. 그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반남이고 고려 말의 학자인 판전교시사 박상충의 아들이며, 이곡의 외손으로, 전법판서 주언방의 사위이며 어효첨의 장인이다. 박은은 15세기 진사시에 합격하고, 문음으로 판숭복도감사를 받은 뒤, 1385년9우황11) 문과에 2위로 급제하여 권지전교시교감, 후덕부승을 거쳐 139년(공양왕3)에 통례문부사 이듬해에 개성부소윤이 되었다. 조선황조가 개창된 뒤에도 지금 주사가 되어 고과에 정최의 성적으로 좌보궐에 서용되고, 1394년(태조3) 지영주사로 있을 때 이방원에게 충성을 다 할 것을 약속하였다. 1412년에는 관향인 반남이 나주에 속하게 되어 금천군으로 개봉되었으며, 겸판의용순금사사가 되어 옥무의 신장정수를 1차 30인으로 정하여 합리적인 형정제도를 시행하였고, 1414년 이조판서 때에는 고공 행정제도를 개선하였다. 이듬해에는 47세의 나이로 우의정이 되어 소년입각의 예에 들게 되었으며, 이어 부원군으로 진봉되고 좌의정 겸판이조사에 올랐다.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될 무렵부터 심온과 대립되어 1418년(세종 즉위년)심온의 옥사 때에는 심온의 반대되는 입장에서 관여하였다는 세평을 듣고 있다. 1421년 병으로 좌의정을 사직하고 이듬해에 죽었다. 문과 초시에서 강경을 채택하도록 강력히 주장하여 시행하도록 하였으니, 초시에 제술을 주장하는 권근 · 변계량의 학통과 다르다. 박은이 강동 지역에 묻힌 것은 부친 박상충의 매부인 광주 안길상의 연고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어효첨(魚孝瞻) [1405년~1475년] : 구천이라는 지명의 유래

  • 자는 만종, 호는 구천이며, 시호는 문효이다 그는 조선 초기의 학자이면서 문신으로, 본관은 함종이고, 집현전 직제학 어변갑의 아들이며, 직제학 성사제의 외손이고, 좌의정 박은의 사위이다. 이효첨이 박은의 사위가 된 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어효첨의 아버지인 어변갑이 직제학에 있으면서 부원군 박은의 별장과 이웃하여 살았다. 하루는 어효첨이 박은의 별장담을 넘어서 뒤뜰에 있는 복숭아를 따막으려다가 발각되어 박은으로부터 운자에 따른 글을 지으라는 벌책을 받자,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 박씨네집 복숭아가 빨갛게 농익었는 까닭에
    내가 먹으려고 담장 동쪽을 넘어왔더니
    당신 아내가 문을 열고 나를 향해 꾸짖으니
    참으로 밉고도 밉도다 바람에 모두 떨어지거라
  • 라고 지으니 그의 나이 8세 때였다. 이 글을 본 부원군은 감탄한 끝에 그를 귀여워해 주고 후에 사위로 삼았다고 한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서거정(徐居正) [1420년~1488년]: 백중사에 시를 남김

  • 서거정으니 초자는 자원이고, 자는 강중이며, 호는 사가정 혹은 정정정이다. 그는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본관은 달성이며, 증조부는 호조전서 서의이고, 아버지는 목사, 서미성이며, 어머니는 권근의 딸이다. 그리고, 최항이 그의 자형이다. 서거정은 6살에 글을 읽고 시를 지어 신동이라 불리웠다. 같은 신동이라 부르던 매월당 김시습과는 동시대를 살면서 가는 길이 서로 달랐다. 그는 4번이나 현과 합격하고 육조의 판서를 두루 지냈으며 대사헌을 2번, 조정에 봉사한 것이 45년, 과거시험관을 23번이나 지내었다. 그는 ‘광진촌서만조(광진 마을 별장에서 저녁때 바라보며) 라는 시를 남겼는데, 시는 현재 강동예찬시비에 새겨져 있다. 서거정의 시는 재사에 넘치는 화가 곳곳에 보이면서 그것이 억지로 꾸민 데가 전혀 없이 순평하며 아주 능숙한 필법과 심후한 역량이 보인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이극배(李克培) [1422년~1495년] : 광주이씨로 광주이씨 광릉부원 군파 묘역에 안장됨

  • 이극배의 자는 겸보이고, 호는 우봉이며, 시호는 익평이다. 그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주이고, 우의정 이인손의 아들이다. 기국과 도량이 키고 깊으며 뜻과 생각이 견고하였다. 경학으로 근본을 삼고 행정의 재능을 겸하였다. 나라의 일을 의논하는 데 대체적인 것에 힘쓰고, 세세한 것은 거론하지 않았다. 오래 정치권력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 사사로이 손님을 맞지 않았으며, 가무는 그릇된 것으로 여겼다. 당시 예조판서 신종호는 이극배의 인품을 알려주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 顯允我公(현윤아공) 훌륭하고 진실한 우리 공이여
    爲世德首(위세덕수) 당세 덕의 으뜸이 되었도다.
    宏度海涵(굉도해함) 넓은 도량은 바다와 같이 깊어
    可以大受(가이대수) 큰 책임을 맡을만 하였다.
    周歷六官(주역육관) 여섯 官을 두루 거치어
    遂踐合斗(수천합두) 드디어 정승 자리에 올랐도다.
    手持化樞(수지화추) 손에 治化의 권을 잡으니
    群物咸作(군물함작) 모든 것이 興起하였다.
    在公一毫(재공일호) 公에게는 털 하나쯤의 것이기에
    付知淡泊(부지담박) 담담하게 여겨버렸다.
    歸視其家(귀시기가) 돌아가 그 집을 살펴보니
    門可羅雀(문가라작) 문에 참새 그물을 칠 지경이었다.(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貧家란 말)
    操履氷玉(조리빙옥) 지조와 행실이 얼음 옥과 같아
    不染纖塵(불염섬진) 조그만 먼지도 끼지 않았다.
    規矩繩尺(규구승척) 規(圓을 그린 기구), 矩(角을 그린 기구), 繩(먹줄이니 直을 잡는것), 尺(자 長短을 헤아리는 것) 마냥 행동하여
    以沒其身(이몰기신) 그 몸을 마치었도다.
    廣津之南(광진지남) 광진의 남쪽이여
    此焉幽宮(차언유궁) 이곳이 유궁(墓)이다.
    我作銘詩(아작명시) 내가 銘詩를 지어
    昭示無窮(소시무궁) 무궁한 뒷날에 분명히 알리노라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이관의(李寬義) [출생·사망 미상] : 1483년(성종 14) 성종이 경서에 밝고 품행이 방정한 인물

  • 이관의의 자는 의지히고 호는 율정이다. 근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로 본관은 광주이다. 이관의는 성리학을 비롯, 천문·지리·기상·역학 등의 일반과학 분야까지 전심하여 각기 일가를 이루었다. 진사에 합격하고 여러 번 대과에 응시하였으나 번번이 낙방하였다. 당시 전시의 위치가 생원의 아래에 있어 나이 많은 진사도 젊은 생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예조에 고쳐줄 것을 상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뒤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율봉도찰방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향리에서 학문 연구에 몰두 하였다. 1438년(성종14)성종이 경서에 밝고 품행이 방정한 인물을 널리 구할 때 손순효의 추천을 받아 경연에서『대학』과『중용』을 강론하였다. 서거정 · 허종 등의 석학은 물론, 성종도 그의 고매한 품위화 박식에 탄복하여 후한 상을 내렸다. 이때 성종이 높이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나이를 핑계로 거절하였다. 손순효가 경기감사로 있을 때 필마로 찾아가 보니 이관의가 보리밥, 풋나물로 접대하여 시를 지어
  • 하늘로 막을 삼고 땅으로 자리를 삼으니
    중간에 누워있어 심흉을 씻으리로다
    세상 사람들이 구구한 일은
    어찌 그리 분분하게 길휼을 따지는고
    하니 손순효가 이에 화답하여
    천과 인을 학구함이 일시에 관절이건만
    누항에 있어 알려지길 구하지 않네
    성군이 불러서 치도를 물으시고
    이에 산림간에 뜻하는데 맡기도다
  • 라 하였다고 한다. 이천의 설봉서원에 제향되었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이극중(李克增) [1431년~1484년] : 광주이씨로 이극배의 형제

  • 자는 경위이고, 시호는 공장이다. 그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주이고,우의정 이인손의 아들이다. 이극증은 1451년(문종1)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괴고, 문음으로 종묘녹사가 되었다. 1456년(세조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군기시직장이 되고, 우정자를 역임하였다. 그 뒤 이조좌랑에 이르도록 항상 서연을 겸하였다. 1461년 정랑에 승진되었고, 1463년 성균관 직강 겸의정부 검상을 거쳐, 사인을 역임하였다 1467년 정략장군 부호군에 임명되고, 얼마 뒤 승정원동부승지를 거쳐 좌승지가 되었다. 이듬해 익대공신 2등으로 광천군에 봉하여졌고, 1469년 도승지를 거쳐, 이듬해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국가 경비의 식례인『식례횡간』을 찬정하였다. 1471년(성종2) 순성명량좌리공신의 호를 받았고, 같은 해 정헌대부로 승계 되어 호조판서가 되었다. 그 뒤 1477년 외직인 잔라도관찰사로 나아갔으며, 이듬해 중앙으로 돌아와 우참찬을 역임하였다. 1479년 병조판서 겸지경연사가 되고, 이듬해 형조판서를 거쳐 1481년 좌참찬이 되었다. 이어 이듬해 병조판서를 거쳐, 1484년 겸동지성균관사로서 문묘를 수축하고 동 · 서무를 넓혀 위판제도를 일신하였다. 또, 향관의 재숙소를 정록청의 북에 두었고, 관사의 무너진 곳을 거쳐 새롭게 하는 등 학궁에 공이 컸고 1488년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 성품이 정직하고 성실하며, 번잡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또한, 관직에 있을 때는 부지런하고 성실히 공사를 처리하였다는 평을 받았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어세겸(魚世謙) [1430년~1500년] : 구천이라는 지명의 유래

  • 어세겸의 자는 자익이고, 호는 서천이며, 시호는 문정이다. 그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함종이며, 판중추부사 어효첨의 아들이고, 우참찬 어세공의 형이며, 좌 박은의 외손이다. 그는 학식이 뛰어날 뿐 아니라 소절에 얽매이지 않아 형조판서로 있을 때에는 출퇴근시간에 구애되지 않아서 오고당상이라 불리었으나. 이치를 능률적으로 하여 결송이 지체되지 않았다 한다. 문무를 겸비하여 내외치에 많은 업적이 있으며, 특히 성종말에는 권근 · 윤회 · 변계량 · 최항의 뒤를 이어 문형을 담당하였다. 1483년 서거정 · 노사신과 함께『연주시격』과『황산곡시집』을 한글로 번역하였으며, 1490년 임원준 등과 함께 『쌍화점』·『이상곡』등의 악사를 개찬하였다. 같은 해 가을에는『주례』를 개주하여 왕에게 올렸고, 1492년 유자광 등과 함께 전해온 여러 진서의 이동을 참작하여『진법』을 편찬하였다. 저서로는『서천집』이 있다. 오늘날의 강동구지역의 옛 명칭인 구천면이라는 지명은 바로 어세겸이 국가로부터 받은 자신의 사패지에 아버지인 어효첨의 호를 따서 구천으로 부른 것이 바로 그 유래이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정성근(鄭誠謹) [?~1504년] : 구암서원에 배향

  • 정성근의 자는 이신이고, 시호는 출정이다. 그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이며, 대제학 정척의 아들이며, 김종직의 문인이다. 정성근은 1474년9성종5)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479년 수찬으로 경영관을 겸하였으며, 1481년 부교리로서 승지의 업무를 맡을만한 인물로 추천된 바 있었고, 경차관으로 경기도 파견되어 교동현의 유민을 진휼하였다.이듬해에는 홍문관 부응교로서 구황적간하기 위하여 전라도에 파견되었고, 1483년 황해도경차관이 되었다. 그가 선위사로 대마도에 갔을 때 대마도주가 주는 화선 · 호초 등을 모두 되돌려주었다. 그 뒤에 도주가 그 물건을 또 특별히 보내와서 나누어주게 하였으나, 그가 완강히 사양하므로 왕은 그 물건을 도로 대마도에 돌려보냈다. 그 뒤 해주목사를 거쳐 1490년 반우형 · 표연말 등과 함께 사우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이어서 경기도경차관, 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에 이르렀는데, 해주목사로 재직 할 때의 부정사실로 탄핵을 받자 사직을 청하였다. 1494년 성종이 죽자 3년 동안 수묘하였으며, 1497년에 다시 서용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군기시 앞에서 참수되었으나, 중종 즉위 후에 신원되고, 그의 충효로 아들이 녹용 되었고, 1507년(중종2)에는 정문이 내려졌다. 또한,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강동구에 있는 구암서원에 제향되었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이극균(李克均) [1437년~1504년] : 광주이씨로 이극배의 형제

  • 이극균의 자는 방형이며,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주이고, 우의정 이인손의 아들이다. 이극균은 1456년(세조2)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무술에도 뛰어나서 세종의 총애를 받고 선전과이 되었다. 1459년 성균관주부를 거치고, 이어 회령도사, 지평, 도체찰사 종사관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김구 · 최항 · 정인지 등과 함께『교정손자주해』를 찬하였다. 1467년 부호군으로 만포절제사가 되었고, 건주위 정벌의 군공으로 3등 공신이 되어 노비 6구를 하사받았다. 1469년(예종1)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었으며, 1472년(성종3)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어 1474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동지중추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오고, 1477년 영안도관찰사가 되었다. 1479년 강원도관찰사가 되고, 1481년 의금부도사가 되었으며, 이어 평안도절도사, 한성부 판윤, 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1484년 대사헌을 거쳐 1486년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이어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95년(연산군1) 다시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1498년 좌찬성을 역임하였으며, 이듬해 경변사로 나아가고 1500년에는 우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좌의정 성준과 함께『서북제번기』와『서북지도』를 편찬하였다. 1502년 영의정 및 좌의정과 함께 시폐십조를 왕에서 상소하였으며, 1503년 좌의정이 되었다. 여러 차례 연산군의 황음을 바로잡으려고 애쓴 것이 화근이 되어, 이듬해 갑자사화때 조타 이세좌와 함께 연루되어 인동으로 귀양가서 사사되었으나. 뒤에 신원되었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이손(李蓀) [1439년~1520년] : 광주이씨

  • 이송의 자는 자방이고, 시호는 홍간이다. 그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주이며, 아버지는 평안도절도사 이수철이며, 어머니는 관찰사 이맹상의 딸이다. 이손은 1459년(세조5)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학문은 물론 활쏘기 · 말타기를 잘 하여 왕명으로 선전관이 되었다. 1470(성종1)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조정랑, 도총부 경력을 역임하고, 김해부사, 판교를 거쳐, 1492년 장례원판결사, 이어 충청도·함경도절도사, 충청도, 황해도·전라도관찰사, 부제학, 우부승지를 지냈다. 1504년(연산군10) 한성부 좌·우윤, 이조·예조참판을 거쳐, 형조·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516년(중종1) 중종반정 때 공을 세워 정국공신3등으로 한산군에 봉하여지고, 우참찬으로 승진하였다. 1508년 좌참찬 재임할 때 재덕이 없고 늙음을 평계로 치사를 요청하였으나 궤장을 하사받고 그대로 유임되었다. 그 뒤 우찬성, 좌찬성을 역임하고, 1512년 일본의 하오 요청을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1513년 한산부원군에 진봉되고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만년에는 영의정 유순, 판서 안침등 남학의 친우들과 구로회를 만들어 서로 왕래하며 즐겼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안윤덕(安潤德) [1457년~1535년] : 광주안씨

  • 안윤덕의 자는 선경이고, 시호는 익혜이다. 그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 본관은 광주이며, 아버지는 안동판관 안팽로이며, 어머니는 복천군 권개의 딸이다. 안윤덕은 1483년(성종14)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사로 등용 되었다. 그뒤 성균관 학유를 거쳐 박사가 되고, 1487년에 종부시 주부, 1488년에 정언을 거쳐 지평이 되고, 이어서 병조좌랑이 되었다. 1495(연산군1)에 형조정랑이 되고, 1497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인 지제교 겸사관이 되었다. 1498년에 사간이 되고, 이어 상례 직제학을 거쳐 1500년에 동부승지가 되었다. 다음 해에 도승지가 되었다가 경상도 ·경기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여 다녀왔다 이 해에 일어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김제에 유배되었다. 1506년(중종1) 중종반정 후 형조참판에 등용되고, 이어서 변조참판을 거쳐 한성 부좌윤이 되었다. 1510년에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지중추부사에 오르면서 경상도 도순찰사 겸 부원수가 되어 왜란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 뒤 한성부윤, 형조판서를 역임하고 1515년 평안도관찰사로 나가서 단군과 기자의 사당을 수축하여 경조정신과 유풍을 크게 떨치게 하였다. 한때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1519년에 공조판서로 복직, 세자책립을 위한 원접사가 되었다. 1526년 기로소에 들고, 1527년에 좌참찬에 이르렀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이윤경(李潤慶) [1498년~1562년] : 광주이씨

  • 이윤경의 자는 중길이며, 호는 숭덕재이고, 시호는 정헌이다. 그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주이며, 이세좌의 손자로, 수찬 이수정의 아들이며, 이준경의 형이다. 이윤경 1504년 갑자사화에 아버지 수정이화를 입자 연루되어 전 가족이 충청도 괴산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아버지가 유배된 둥안 이윤경은 어머니로부터『효경』·『대학』의 가르침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지략이 많고 학문이 깊어 1531년(중종26)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3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고, 이어서 홍문관으로 옮겨 부수찬, 수찬, 부교리, 교리를 역임학, 사간원·사헌부로 옮겨 정언, 사간, 지평을 지냈다. 1543년 의주부윤이 되어 국방을 강화하였고, 인종의 즉위화 더불어 다시 내직으로 옮겨 대사간이 되어 현량과를 다시 실시할 것을 청하였다. 이어 승정원 3등에 책록되고 광산군에 봉하여졌으며, 성균관 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이기의 품성이 거칠고 위험함을 논박하다가 쫓겨나서 성주목사가 되어 고을을 잘 다시리니, 성주고을 선비와 백성들이 감복하여『운간이사군』이라는 노래로 치하하였다. 이때 아들 중열이 이덕응 사건에 몰려 사사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1550년(명종5) 공훈과 관직이 삭탈되었다가 1553년 용서되어 다시 승지를 지냈다. 1555년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전주부윤으로서 영암성에서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고, 그 동으로 전라도관찰사로 승진하였다. 그 뒤 경기도관찰사, 함경도관찰사, 도승지를 거쳐 1560년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이때 여진족이 자주 국경을 노략질하자 국왕이 “평안도가 더욱 중하니, 반드시 최적임자를 선택하여야겠다.”고 하여 수망으로 천거되었다. 오래 앓던 끝이란 몸이 허약하였으나, “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 어찌 평안하기를 바라겠는가”하고 평안도관찰사에 부임하여 국방을 강화하다가 마침내 공관에서 병사하였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이준경(李浚慶) [1499년~1572년] : 광주이씨

  • 이준경의 자는 원길이고, 호는 동고 · 남당 · 홍련거사 · 연방노인이며, 시호는 충정이다. 그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주이며, 홍문관수찬 이수정의 아들로, 한성부 동부 연화방에서 태어났다. 이준경은 1504년(연산군10)갑자사화 때 화를 입어 사사된 할아버지 이세좌와 아버지에 연좌되어 6세의 어린 나이로 형이 이윤경과 함께 충청도 괴산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외할아버지 신승연과 황효헌에게서 학업을 닦고, 이연경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배웠다. 1553년에 함경도 지방에 야인들 침입하자 함경도 순변사가 되어 그들을 초유하고 성보를 순찰하였다. 이어 대사현과 병조판서를 다시 지내고 형조 판서로 있다가 1555년에 을묘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순찰사로 출정하여 이를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우찬성에 오르고 병조판서를 겸임하였으며, 1558년에 우의정, 1560년에 좌의정, 1565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1567년 하성군 균을 왕으로 받드니, 이가 바로 선조이며, 원상으로서 국정을 보좌하였다. 이때 기묘 사화로 죄를 받은 조광조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을사사화로 억울하게 수십년 간 유배생활을 한 노수신 · 유희춘 등을 석방하여 등용하는 동시에 을사사화로 죄를 받은 모든 사람을 신원하였다. 그러나, 기대승 · 이이 등 신진사류들과 뜻이 맞지 않아 이들로부터 비난과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1571년(선조4)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 부사가 되었다. 임종 때 붕당이 있을 것이니 이를 타파하여야 한다는 유차를 올려 이이 · 유성룡 등 신진사류들의 규탄을 받았다. 저서로는『동교유고』·『조선풍속』등이 있다. 판서 오상이 그의 죽음을 곡한 시에
  • 공은 종사에 남고 은혜는 백성에 끼쳤으니
    종시 잘하기 이 한 분 뿐이니
    백년 뒤 공의소리 듣기지 아니하더라도
    시비소리 어찌 땅속에 걸리오리
  • 이라 하였다. 선조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충청도 청안의 구계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보우(普雨) [1509년~2565년] : 고덕동에 절을 지었음

  • 보우는 법명으로 그의 호는 허응 또는 나암이다. 보우는 조선 중기의 고승으로 가계 등은 미상이다. 15세기에 금강산 마하연암으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그 뒤 금강산 일대의 장안사 · 표훈사 등지에서 수련을 쌓고 학문을 닦았다. 6년 동안의 정진끝에 마음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법력을 얻었고, 그밖에도 대장경을 모두 섭렵하는 한편『주역』도 공부하였다. 당시 그를 지도해준 스승이 누구였는지는 명확하게 나타나 있지 않으나 여러 가지 문헌을 종합해보면, 경기도 용문사의 견성암에 있던 지행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드 뒤 탁월한 수양력과 불교·유교에 관한 뛰어난 지식을 바탕으로 유명한 유학자들과도 깊이 사위었다. 그 중에서도 재상이었던 정만종과는 특별한 사귐이 있었다. 정만종이 보우의 인품과 그 도량이 큼을 조정과 문정대비에게 알리게 됨에 따라, 뒷날 문정대비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보우는 억불정책 속에서 불교를 중흥시킨 순교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그는 선교일체론을 주장하여 선과 교를 다른 것으로 보고 있던 당시의 불교관을 바로잡았고, 일정설을 정리하여 불교와 유교의 융합을 강조하였다. 저서로는『허응당집』3권과『나암잡저』1권,『수월도량공화불사여환빈주몽중문답』1권,『권념요록1권 등이 있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이의건(李義健) [1533년~1621년] : 수곡서원에 배향

  • 이의건의 자는 의중이고, 호는 동은이다. 그는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전주인데,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 이여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배천군수 이수한이며, 어머니는 경주 최씨이다. 그는 1564년(명종19)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뒤에 학행으로 돈녕부 직장이 되었으나 친상으로 곧 사직하였으며, 1610년(광해군2) 이항복의 주청으로 공조좌랑이 되고, 이어 공조정랑에 올랐으나 사퇴하였다. 그는 당시의 명유들과 교유하며 시명을 떨쳤고, 후학의 양성에 전력하였다. 글씨에도 능하였다. 광주 수곡서원과 영평의 옥병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동은유고』가 있다. 그의 글씨는 광평대군 여의 묘비에 새겨져 있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심희수(沈喜壽) [1556년~1595년] : 일자산에 은거

  • 자는 백구이고, 호는 일송 혹은 수뢰루인이며, 시호는 문정이다. 그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송이며, 정자, 심건의 아들이며, 인순황후의 종제이고, 이연경의 외손자이다. 심희수는 노수신의 문인으로, 1570년(선조3)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 해 이황이 죽자 성균관을 대표하여 장례에 참여하였고, 157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임되고 1583년 호당의 옥사가 확대되는 것을 막으려다 조정과 뜻이 맞지 않아 한때 사임하였다가 이듬해 부응교가 되었다. 1591년에도 응교로서 선위사가 되어 동래에서 일본사신을 맞았으며, 이어 간관이 되어 여러 차례 직언을 하다가 선조의 비위에 거슬려 사성으로 전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위주로 선조를 호종하여 도승지로 승진하고, 대사헌이 되었다. 때마침 명나라 조사가 오자 다시 도승지가 되어 응접하니 그가 중국어를 잘 하였기 때문이다. 이 해 겨울 형조판서를 거쳐 호조판서가 되어 명나라 경락 송응창의 접반사가 되어 오래도록 서도에 있었으며, 송응창을 설득하여 관서의 기민구제에 진력하였다. 1599년 예문관 제학, 예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가 되고, 홍문관 ·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고서 안으로는 사명을 장악하고 밖으로 접빈에 힘썼다. 좌찬성, 우찬성 등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며, 청백리에 뽑혔다. 1606년 성균관에서 익명의 투서가 나왔는데, 선조가 이를 색출하기 위하여 유생들의 심문을 고집하자 그는 불가함을 말하여 뜻을 관철시켰으며, 그 해 가을에 좌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을 추숭하려 하자 예전에 어긋남을 강력하게 표하여 그 논의를 중지시켰다. 1607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다시 좌의정으로 입상하였다. 그러나 귄신 이이첨등이 국정을 장악하여 임해군을 극형에 처하려 하자 이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1613년(광해군5)계축옥사가 일어나 부원군 김제남이 죽고 이이첨 등이 영창대군을 옥사의 주모자로 몰아 해치려 하자 이항복 · 이덕형 등과 강력하게 그 부당성을 논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듬해에 영창대군의 처형은 인륜에 어긋나며, 그 가해자인 강화부사 정항을 참수하라고 주장하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산 정온을 적극 변호하여 귀양에 그치게 하였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안황(安滉) [?~1593년] : 광주안씨

  • 안황의 자는 경호인데,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주이며, 아버지는 목사 안여경이고, 선조의 매부로서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벼슬을 시키려 할 때마다 사양하고 벼슬을 원치 않아 매양 임시변동으로 사양하였다. 1574년(선조7) 문과 초시에만 합격하였고, 벼슬할 뜻이 없었다. 그러다가 한번은 문과정시에 응하였기에 선조가 좋아서 시를 보내,
  • 홀연히 꽃다운 이름 계림에 걸어보니 율율한 이 기쁜 어이나 깊었던고,
    엄부의 정훈을 쫓아서 이룬다면 어머니 단직 하시던 마을
    또한 위로하리,
    봉지에 붓 적시기도 응당 멀지 않으리니 죽백에 이름 남김에 또한 눈앞이라,
    멀리 일산자작 나부끼는 언저리엔 은혜와 명예로움 달아내 흡족하리
    하였으나, 끝내 급제하지 못하였는데, 1577년에 왕의 지친으로 6품직에 기용되었고, 1590년에 사도시정을 역임하였다.
    그는 평상시 조심스럽고 벼슬하기에 급급치 않고 오직 행동으로 닦으니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버이가 병이 나자 단지하였고, 상을 입자 노막에 살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의원정으로써 내승을 겸해, 외아들로서 편모와 처자를 버리고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밤낮으로 왕을 호종하였는데, 대가가 군읍에 들 때마다 여러 사람의 문안이 끝나면 거적을 계단 밑에 깔고 않아 임금이 침소에 든 후라야 물러나고, 이튿날이면 미명에 반드시 들어가 대후하고, 저녁이 되면 또 이같이 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싫증냄이 없이 진상에 절도가 있어 왕이 감탄하였다. 1592년에 돈영부 도정을 역임하였는데, 1593년 위주로부터 환도하는 중도에 죽었다. 1604년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고 광양군에 추봉되었으며, 그의 아들 응원은 6품직에 승서되었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이정립(李廷立) [1556년~1595년]

  • 자는 자정이고, 호는 계은이며, 시호는 문희이다. 그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주이며, 아버지는 판결사 이시무이며, 어머니는 종실인 의원군 이억의 딸이고, 이이 · 성혼의 문인이다. 이정립은 1576년 사마시에 합격, 1580년에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1582년 수찬으로 있을 때, 대제학 이이에게 추천되어 이덕형 · 이항복과 함께 경연에서 『통감강목』을 시강하여 삼학사의 한 사람으로 칭송을 받았다. 그 해 사관이 되고, 예조좌랑, 정언이 되었다. 이듬해 사가독서를 하였다. 이조좌랑으로 있을때 어사가 되어 호남에 내려가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을 진구하였다. 그 뒤 형조참의, 좌승지 등을 거쳐, 1589년(선조22)에 기축옥사를 다스린 공로 평난공신이 되었다. 장령, 집의, 응교, 직제학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예조참외로 황을 호종하였다. 왕의 행차가 금교역에 이르렀을 때에 그가 선조에게, 종묘와 사직의 위판이 지금 개성에 남아 있다고 아뢰니 선조가 크게 놀라면서 즉시 모셔와라 하였다. 그는 급히 개성으로 달려가, 사람들이 모두 “이미 적장이 와 있으니 죽음이 있을 뿐이다.”고 말렸으나, 죽음을 무릅쓰고 성에 들어가 종묘사직의 위판을 평양으로 모셔갔다. 이어 병조참판이 되었다가 1593년에 부친상을 다하여 한때 관직을 떠났다. 1595년에 한성부 좌윤,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 광림군에 봉하여졌고, 1596년에 대사성이 되었다. 뒤에 여의정에 추증 되었으며, 저서로는『계은집』이 있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오윤겸(吳允謙) [1559년~1636년]

  • 자는 여익이고, 호는 추탄 또는 토당이며, 시호는 충간이다. 그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해주이며, 선공감역 오희문의 아들이고, 성혼의 문인이다. 오윤겸은 1582년(선조15)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89년 정강에서 장원하여 영릉참종, 본선전 참봉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호체찰사 정철의 종사관으로 발탁되었으며, 시직을 거쳐 평강현감으로 5년간 봉직하면서 1597년 별시문과에 병가로 급제하였다. 부교리를 역임하였다. 1602년 모함을 받아 곤경에 처하여 있던 스승 성혼을 변호하다가 시론의 배척을 받아 경성판관으로 출보되었으며, 그 뒤 7,8년 간 안주목사, 동래부사 등의 최직을 전전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안주성의축조를 담당하였으며, 북도순안어사로서 함경도의 민폐를 조사하기도 하였다. 1610년(광해군2) 비로소 내직으로 등어와 오초참의, 우부승지, 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으며, 당시 권시인 정인홍이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종사를 반대, 사림과 대립하자 이를 탄핵하다가 왕의 뜻에 거슬려 강원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년 남짓 관찰사로 재임하는 동안 기민을 구제하고, 한쳔으로는 영월에 있는 당종의 묘를 수축하여 그 제례절차와 각 고을로부터의 제수마련 법식을 제정하여 이후 이를 준용하게 하였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이덕형(李德馨) [1561년~1613년]

  • 자는 명보이고, 호는 한음 · 쌍송 · 포옹산인이며, 시호는 문익이다. 그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주이고, 지중추부사 이민성의 아들이며, 영의정 이산해의 사위이다. 이덕형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고 침착하였으며, 문학에 통달하여 어린 나이로 양사언(양 사 언)과 막연한 사이였다. 1580년(선조13)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의 관원이 되었으며, 재주 있는 신하로 선발되어 선조로부터 서적을 하사받았다. 1582년 명나라에서 조사로 온 왕경민이 그를 만나려 하였으나 사사로이 면대함은 도리에 어긋남을 들어 사양하였다. 이에 왕경민은 만나보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그의 인격이 출중함을 칭찬하는 글귀를 전하였다. 이어 정자를 거쳐 1583년에 사가독서를 하였고, 이듬해 서총대의 응제에서 수석에 선발되었고, 이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수석을 차지하였다. 그뒤 부수찬, 정언, 부교리를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고, 1588년 이조정랑으로서 일본사신 겐소 등을 접대하여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1950년 동부승지, 우부승지, 부제학, 대사간, 대사성 등을 차례로 역임하고, 이듬해 예조참판이 되어 대제학을 겸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북상중인 왜장 고니시가 충주에서 그와 만날 것을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여 단기로 적진으로 향하였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왕이 평앙에 당도하였을 때 왜적이 벌써 대동강에 이르러 화의를 요청하자. 그는 단독으로 겐소와 회담하고 대의로써 그들의 침략을 공박하였다. 그 뒤 정주까지 왕을 호종하였고, 청원사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명군의 파병을 성취시켰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정엽(鄭曄) [1563년~1625년]

  • 정엽의 자는 시회이고, 호는 수몽이며, 시호는 문속이다. 그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초계이며, 진사 정유성의 아들이다. 정엽은 3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4세 때에 벌써 시를 지어 이이와 정유길로부터 신동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이지함의 주선으로 송익필에게서 수업하고, 성혼·이이 문하에 출입하여 당시의 명유들과 교유하였다. 1583년(선조1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을 거쳐 홍운관의 문한직을 맡았다. 1587년 감찰, 형조좌랑이 되었으며, 1593년 황주판관으로 왜군을 격퇴, 그 공으로 중화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홍문관수찬, 장령을 거쳐 서천군수를 역임하였다. 졍엽의 시문집으로『수몽집』이 전해지는데, 8권 2책 목판본으로, 사위 나만갑이 수집하고 1669년(현종10)에 아들 성두가 간행하였다. 권두에 송시열의 서문이 있고, 발문은 없다. 시는 오언단률, 오언고시, 칠언절구, 칠언율시 등 형식이 다양한데 칠언정구와 칠언율시가 asg다. 봉사는 대부분 사직에 관한 것이나 만언소에서는 교육 · 과거 · 부세제도 및 붕당의 폐단을 지적하고 그 시정방안도 아울러 제시하고 있다. 차의 옥당차는 임진왜란 후에 민생이 피폐해졌음을 지적하고 언로를 열어 인재를 등용하고 아첨하는 자들을 조정에서 축축하고 경비를 절감할 것 등을 건의한 내용이다. 계사는 인성군과 대목대비의 폐위 및 인조반정과 관련하여 올린 것이 대부분이다. 서독은 김장생 · 최명길등 당대의 명유에게 보낸 것으로 사단칠정 · 이기론 등에 관한 내용이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어기영(魚起瀛) [1355년~1625년] : 어씨의 고덕동 입향조

  • 어기영의 자는 증거인데,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함종이며, 함종부원군 어세겸의 7세손이다. 어기영은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워 유명해졌는데, 정유재란이 일어났던 1598년 무과관으로 올랐다.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로 오위도총부 부총관으로 있었는데, 광해군의 폐행이 거듭되자 천성이 강직하고 청렴한 그는 벼슬을 버리고 고덕동으로 낙향 은거하니 어씨들이 고덕동에 세거하는 시작이 된다. 인조반정 뒤 조정에서는 여러 관직을 주며 불렀으나 다시는 출사하지 않았다. 1625년9인조3)에 고덕동에서 졸하니 조정에서 병조참판을 추증하고 아성군의 호를 내려주었다. 원래 고덕동에 모가 있었으나. 1982년 고덕동 지구 개발로 여주로 이장하였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임숙영(任菽英) [1576년~1623년] : 구암서원에 배향,무덤이 상일동 인터체인지 청뜰에 있음

  • 임숙영의 초명은 상이고, 자는 무숙이며, 호는 소암이다. 그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천이며, 감역 임기의 아들이다. 임숙영은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지었고, 기억력이 뛰어났다 하다. 1601년(선조34) 진시가 되고, 성균관에 10년 동안 구학, 논의가 과감하였으며 전후 유소가 그의 손에서 나왔다. 1611년(광해군3) 별시 문과의 대책에서 주어진 이외의 제목으로 척족의 횡포와 이이첨이 왕의 환심을 살 목적으로 존호를 올리려는 것을 심하게 비난하였다. 이를 시관 심희수가 적극 취하여 병과로 급제 시켰는데 광해군이 대책문을 보고 크게 노하여 이름을 삭제하도록 하였다. 몇 달간의 삼사의 간쟁과 이항복등의 부장으로 무마,다시 급제되었다. 그 뒤 승문원 정자, 박사를 거쳐 주서가 되었다. 1613년에 영창대군의 무옥이 일어나자 다리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정청에 참가하지 않았다. 곧 파직되어 지에 지내다가 외방으로 쫓겨나 광주에서 은둔하였다. 인조반정 초에 복직되어 예문관 검열과 홍문관 정자, 박사, 부수찬 등을 거쳐 지평에 이르렀다. 고문에 힘썼으며, 중국 육조의 사륙문에 뛰어났고, 경사에 밝았다. 지서로『소암집』『통군정서』등이 있는데, 특히 그가 지은『통근정서』는 중국학자들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다 한다. 『소암집』은 임숙영의 시문집으로 8권 3책 목판본이다. 권1~2는 시 111수, 배율4편, 고시15편. 권3~5는 부1편, 기9편, 서45편. 권6~8은 제, 표, 전 각1편, 계8편, 서6편, 설, 제문1편, 비갈3편,소2편, 잡저4편, 습유33편, 부록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관학유생청종사소』는 1608년(선조41)에 성균관의 유생을 대표하여 올린 것으로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의 학문과 국가에 이바지한 공훈은 중국의 선철들에 결코 뒤지지 않으므로 문묘종사할 것을 청한 글이다. 『동해풍파설』은 풍파는 바다 안에서 항상 일어나지만 그곳에 있는 사물은 이것에 잘 적응되기 때문에 커다란 변화없이 계속되어 나간다고 설명하면서, 세상의 풍파도 벼슬길에 생겨나지만 익숙한 사람은 변고를 당하지 않고 잘 적응해 갈수 있으며 그때마다 지혜가 늘어나고 있다고 설명한 글이다.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장본(도서번호:811.98. 임숙영-소-판)으로 보존되어 있다. 후에 부제학에 추정되고, 강동구의 구안서원에 재향되었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이경석(李景奭) [1595년~1671년] : 광주에 거주

  • 이경석의 자는 상보이고, 호는 백현이며, 시호는 문충이다. 그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이며, 종실 덕천군의 6대손이고, 동지중추부사 이유간의 아들이다. 이경석은 김장생의 문인으로, 1613년(광해군5) 진사가 되고 1617년 증광별시에 급제하였으나. 이듬해 인복대비의 폐비상소에 가담하지 않아 삭적되고 말았다. 그 뒤 1623년 인조방정이 있는 후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 부정자를 시작으로 선비의 청직으로 일컫는 검열, 봉교로 승진하였고 동시에 춘추관사관도 겸인하였다. 이듬해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동주로 몽진을 하게 죄다 승문원주서로 왕을 호종하여 조종의 신임을 두텁게 하였다. 이어 봉교, 전적, 예조좌랑, 정언, 교리 등을 두루 거친 뒤 1626년(인조4)에는 호당에 선입되었다. 또한, 같은 해 말에는 이조좌랑, 이조정랑에 올라 인사행정의 실무를 맡게 되었다. 이듬해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제찰사 장면의 종사관이 되어 강원도 군사모집과 군량미조달에 힘썼다. 이때에 쓴『격강원도사부부로서』는 특히 명문으로 칭송되었다. 1629년 자청하여 양주목사로 나가 목민관으러서의 실적을 올렸다. 그 뒤 승지를 거쳐 1632년에는 가선대부에 오르고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평생『소학』과『논어』를 거울삼아 수양하였고, 노년에는『근사록』과 주자제서를 탐독하였다. 문장과 글씨에 특히 뛰어났는데 그의 시문은 경학에 근본한 것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문장은 “기력이 웅혼하여 광화현란하며, 시도 활동양염하다.”는 칭송을 받을 만큼 필력이 뛰어나『삼전도비문』등을 찬술하기도 하였다. 그의 정치적 생애는 17세기의 초기·중기에 해당하는 인조·효종·현종의 3대 50년에 걸쳐 시국의 안팎으로 얽힌 난국을 적절하게 주관한 명상으로 보냈다. 그 자신이 지양하려던 의도와는 달리 생애 말년에는 차츰 당쟁 속에 깊이 말려들어가, 사후에는 심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백헌집』등 유집 50여군이 간행되었고, 조경 · 조익 등과 함께『장릉지장』을 편찬하였다. 글로는『삼전도비문』이 있으며, 글씨로는 좌상이정구비문·이판이명한비·지돈녕정광성비문 등이 있다. 남원의 방산서원에 제향되었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이원정(李元禎) [1622년~1680년] : 광주이씨

  • 이원정의 자는 사징이고, 호는 귀암이며, 시호는 문익이다. 그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주이며,, 아버지는 이도장이며, 어머니는 김시양의 딸이다. 정구의 문인이며, 큰 학자였던 할아버지 윤우에게도 수학하였다. 이원정은 1648년(인조26) 사마시를 거쳐 1652년(효종3) 증광 문과에 갑과로 급제, 검열, 교리를 지내고 1660년(현종1)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종래부사가 되었다/site/contents/culture 1670년 청나라에 사은부사로 다녀왔으며, 1673년 도승지, 1677년(숙종3) 대사간, 형조판서를 지냈다. 1680년 이조판서로 있을 때에 경신대출척으로 초산에 유배가던 도중에 불려와 장살당하였다. 9년 뒤인 1689년 신원 되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신원된 두에도 여러 차례 정국의 변화에 따라 추탈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구임문집』이 있으며, 편저에는『경산지』가 있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오명항(吳命恒) [1673년~1728년] : 오윤겸의 현손

  • 오명항의 자는 사상이고, 호는 모암 · 영모당이며, 시호는 충효이다. 근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해주이며, 영의정 오윤겸의 현손이며, 아버지는 오수량이다. 오명항은 1705년(숙종31) 식년 문과에 을과로 듭제하여 1709년 교리를 거쳐 설서, 사서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부수찬, 1715년 부응교, 이조좌랑을 지냈다. 1716년 승지에 이어 경상도와 강원도·평안도의 관찰사 등을 거쳐 사직으로 있다가 1724년 (영조 즉위년)에 소론이 실각하자 사직하였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등용될 때 지중추부사로 기용되어 이조와 병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이듬해 이인좌의 난이 일아나자 판의금부사로 4도도순무사를 겸하여 난을 토평하여 분무공신 1등이 되고 해은부원군에 봉해졌다. 이어 우찬성에 성진되었으나 허락되지 않고 우의정으로 발탁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효자정문이 세워졌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이벽(李擘) [1754년~1786년] : 공주에 거주

  • 이벽의 자는 덕조이고, 호는 광암이며, 세례명은 요한세자이다. 그는 조선 추기의 학자로, 본관은 경주이며 세거지인 경기도 광주출신이고 무반으로 이름 높은 가문의 후손으로, 이부만의 아들이다. 그리고 정약용의 누이와 결혼하였다. 이벽은 이익을 스승으로 하는 남인학자의 일원이었으며, 이가환 · 정약용 · 이승훈 · 권철신 · 권일신 등과 깊은 교유관계를 맺었다. 무반으로 출세하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소원을 뿌리쳤으며, 문신으로도 진출하지 않고 포의서생으로 생애를 마쳤다. 이른 시기부터 조선 후기 주자학의 모순과 당시의 유교적 지도이념이 흔들리고 있음을 깨달아 새로운 사상을 모색하던 중, 사신들을 통하여 청나라로부터 유입된 서학서를 열독하였다. 당시 중국에 와 있던 서양선교사들과 중국의 실학자 서광계 · 이지조 동이 저술한 한문으로 된 천주교 서적들을 천주교의 교리 · 신심 · 철학 · 전례와 아울러 서구의 과학·천문·지리 등의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이러한 서적들을 치밀히 연구함으로써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수용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였다. 이벽은 이 교단조직의 지도자로서 그이 집에서 포교 · 강학 · 독서 · 사법 등의 천주교 전례의식을 주도하였으며, 새로 입교한 남인학자들은 모두 그의 제자로 청하였다. 1785년 봄에는 장례원 앞에 잇는 김범우의 집에서 사대부 · 중인 수십 명이 모인 가운데 ‘설법교회’하는 모임을 매우 엄격하게 진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천주교 모임은 그 해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세상에 드러나 커다란 타격을 받았으며, 성균관 유생들의 척사운동으로 인하여 일단 해산되었다. 그 뒤 천주교 신앙에 대한 아버지의 결사적인 반대를 받아, 당시 사회에서 포기할 수 없었던 효정신의 윤리관과 새로운 진리로 체득한 쳔주교사상 중에서 양자택일을 하여야 하는 심각한 갈등 속에서 괴뇌하다가 페스트에 걸려 죽었다.한편 그의 말년의 신앙에 대하여 달레(Dallet, C. H.)는『한국천주교회사』에서 배교로 단정하고 있으나, 효를 절대적인 이면으로 하던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그렇게 단순히 처리할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그의 저작으로는『성교요지』가 유일하게 전해진다. 이것은 전반부는 신 구약성서를 중심으로 한 한시로 기독교성서의 이해와 복음정신의 사회화인 구세관을 표현하고, 후반부는 로마서를 중심으로 하여 사회정의론이라 할 수 있는 정도관을 서술한 것으로서, 저자의 성서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드러내는 동시에, 당시 우리나라의 자발적인 천주교 수용이 성서를 기반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는 기독교사상과 동양 유학사상이 결합된 윤리와 규범을 제시하였으며,그것은 후일 한국 천주교가 유례없는 대박해를 이겨낼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엄주익(嚴住益) [1872년~1931년] : 묘가 고덕산 매봉에 있음

  • 엄주익의 호는 춘정이며, 1902년에 군부 포공국장, 한성판윤, 1903년 군부협판, 1904에 법무협판, 육균참장, 군부대신서리 등을 지냈다. 군부협판으로 있을 때 근대적인 군사제도를 시찰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서양의 새로운 사조에 접한 당시 일본의 신문물에 감동을 받았다. 우리나라의 급선무는 근대적인 교육의 보급임을 깨닫고 귀국한 그는 양정의숙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1906년 2월, 올바르게 길러서 깨우쳐준다는 ‘몽이양정’의 기치 아래 기부금과 사재로 양정의숙을 설립, 숙장에 취임하였다. 1907년 엄귀비로부터 200여만 평의 토지를 하사 받았다. 양정의숙을 설립한 뒤에도 교육부총감사무서리, 군부대신서리, 평리원재판장, 적십자사부사장,육군법원장, 궁내부특진관 등 관계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907년 11월에는 영친왕 이은이 일제 통감부에 의하여 강제로 일본 유학을 하게 되었을 때 배종하기도 하였다. 그 뒤에도 규장각지후관, 경선궁감무 등을 지내면서 서구의 신문호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여러 차례 일본을 다녀왔다. 1910년 국권상실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일제 관계를 떠나서 교육사업에만 심형을 기울였다. 1913년 재단법인 양정의숙 이사장에 , 같은 해 10월에 양정고등보통학교 교장에 선임되었다. ‘서예’라는 말을 창안하고 조선서화동연회를 조직, 초대회장이 되고 국정을 통해서 현대 서예계에 크게 영향을 까친 소전 손재형이 그의 스승의 비문을 예서로쓰고, 성산 이기윤이 찬하였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신익희(申翼熙) [1894년~1956년] : 강동구 해공공원의 유래

  • 신익희의 호는 해공으로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로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서하리 출신이다. 그는 조선시대 판서를 재낸 신단의 다섯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신익희는 어려서 사서삼경을 비롯한 한학을 익혔고, 1908년 한성관립외국어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유학하였다. 1913년 와세다대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17년부터는 보성전문학교의 전신인 보성볍률고등학교에서 비교헌법 등의 강의를 받기도 하였다. 1918년 미국 월슨(Wilson, T. W.)의 민족자결원칙이 발표됨과 더불어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만주 · 북경 · 상해 등지를 드나들면서 해외독립운동원과의 연락을 받아보고, 안으로는 민족지도자들과 독립운동의 방법을 토의하여 3·1 운동의 도화선을 당기는 데 일역을 담당하였다. 만세시위에 가담했던 그는 1919년 3월 다시 상해로 떠나 그로부터 26년 간의 망명생활을 시작하였다. 상해에 있는 동안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기초하고 임시정부의 초대대의권과 초대내무차관을 지냈으며, 그 뒤 내무종장, 법무종장, 문교부장, 외무부장 등을 두루 맡았고 국무원 비서실장과 의정원 부의장을 겸임하였다. 그는 독립운동에 몸담기 시작하면서부터, 독립운동이 처음에는 평화적인 방식으로 시작되더라도 나중에는 반드시 군사행동에 위하여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광복이 된 뒤 1945년 12월 임정요인의 한 명으로 귀국한 그는 곧바로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나들어 부의장을 맡았으며, 국민대학 학장과 자유신문사 사장직도 맡았다. 그 뒤 미군정하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을 거쳐, 정부수립과 함께 제한국회에 진출하였고, 대통령으로 뽑힌 초대국회의장 이승만의 뒤를 이어 국회의장이 되었다. 1947년에 대한국민당을 결성하여 대표최고위원이 되었으며, 1950년 한국민주당과 합당, 개편된 민주국민당의 위원장으로 뽑혔다. 그동안 그는 3선국회의장으로 정치적 비중을 더해갔으며, 권력의 연장을 위하여 사사오입개현까지 자행한 이승만으로부터 민심이 등을 돌리자. 1956년 야당의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였다. 그 해 5월 2일 한강백사장에서 열린 그의 유세에는 무수한 인파가 모여 그의 인기를 실증하였다. 그러나 그 3일 뒤인 5월 5일 호남 지방에서의 유세를 위하여 전주로 가던 중 기차 속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에게는 추모표로서 185만여표가 던져졌으며, 5월 23일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서울 우이동에 안장되었다. 신익희는 대한민국 건국 후 재헌국회 때 광주지역에서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현재 강동구 해공공원이 신익희의 호를 따서 붇여진 이름이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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