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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변천사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6000년의 역사와 문화의 발원지 ‘강동구’

강동구 선사문화의 역사지리적 환경

  • 한강(漢江)은 압록강(鴨綠江)·두만강(豆滿江)·낙동강(洛東江)·대동강(大同江)·금강(錦江 )과 더불어 그 길이에 있어 우리나라 6대 하천의 하나이지만, 그 유역면적(流域面積)에 있어서는 으뜸으로 꼽히는 강이다.더구나 한강은 그 지류인 남한강(南漢江)과 낙강이 소백산맥(小白山脈)을 사이에 두고 약 40㎞의 연수육로(連水陸路)로 연결된다는 점에 비추어, 이 강은 한반도(韓半島) 종관수송로 (縱貫輸送路)의 중심축의 구실을 다하여 왔던 것이다. 이 사실은 겨레와 나라의 역사 전개의 시·공간적(視·空間的) 장(場) 가운데서 자리매김 되는 한강의 지정학적(地政學的)·전략적(戰略的) 위상을 새삼 눈여겨보게 만드는 대목이 된다.
  • 그러므로 한강 유역일대의 역사와 문화가 유사(有史) 이래 오늘날까지 우리민족사 전개의 굽이굽이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남다름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또 이 점은 오늘날 고고학계(考古學界)와 역사학계의 노력에 힘입어 속속 확인되고 있다.그러므로 이 한강 유역 일대에서는 선사시대 주민들이 남긴 문화의 발자취가 곳곳에서 발굴(發掘)·조사·보고되어지고 있음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선사문화와 신석기시대 그리고 암사동 유적

  • 선사시대(先史時代)란 인류(人類)가 연모 곧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대체로 홍적세(洪績世)가 개시되는 250만 년 전부터 청동기문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의 시기로서, 대체로 문자기록이 없었던 시대를 지칭한다.
    이러한 선사시대의 문화, 즉 선사문화(先史文化)는 그 연모의 자료와 제작방법에 따라 구석기문화에서 신석기문화로 발전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50 ~ 60만 년 전 구석기 시대부터이다. 이때는 지질학적으로는 제4기 홍적세로, 네 번의 빙하기(氷河期)와 세 번의 간빙기를 거치는 등 기후와 지형의 변화가 매우 심한 시기였다.
    당시 사람들은 타제석기(打製石器:뗀석기)를 사용하면서 수렵·채집경제(狩獵·採集經濟)를 바탕으로 한 ‘식량채집단계(food-gathering stage)'의 삶을 꾸려나갔던 것이다.
    그 후 지구는 지금부터 1만 년 전부터 지질학적으로 충적세(沖積世)로 접어들면서, 기온의 상승과 함께 지금과 비슷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곧 이 시기에 들어와 기온이 상승함에 따라 해수면 역시 높아지고, 한반도(韓半島)와 일본열도(日本列島)는 격해·분리되었다. 또한 한반도의 식생(植生)은 낙엽활엽수림대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면서 새로운 문화 즉 신석기 문화를 가꾸어 나가게 되었으니, 이 시기가 바로 신석기시대인 것이다.
    신석기문화라 함은 새로운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농경(農耕)을 배경으로 전개된 문화를 말한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는 농경보다는 토기(土器) 곧 질그릇이 먼저 제작되고, 마제석기(磨製石器) 혹은 간석기를 사용한 곳도 있다. 그 대표적인 지역이 한국·일본·시베리아(Siberia)이다. 한국의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6000년경부터 시작되어, 지역적 특색을 지니면서 발전되었다. 그러나 농경의 시작은 현재까지의 연구성과를 감안할 때 기원전 2000년경 신석기시대 말기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한국에서 농경을 바탕으로 한 ‘식량생산단계(food-production stage)'에 본격적으로 진입하는 것은 기원전 12~10세기 이후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에 이르러서인 것으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 유적(遺蹟)의 수효는 약 150곳에 이른다. 이들은 한반도 전역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지 않고, 주로 대동강·한강 유역 및 그 인접도서(島嶼)를 포함한 서해안 지역, 두만강 유역을 포함한 동북 해안지역, 그리고 낙동강 유역을 포함한 남해안 지역 등 세 개 지역에 밀집 분포되어 있다. 아울러 이들 세 지역군 사이의 문화 양상(樣相)의 차별성 또한 적지 않다.
    이 가운데 한강 유역의 유적은 서해안 도서지방에서 발견되는 유적과 연결되는 하나의 큰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어, 기타 지역과의 문화상을 비교해 볼 수 있는 지표(指標) 유적 집중지역이다. 즉 이 지역에서 출토되는 즐문토기(櫛文土器) 또는 빗살무늬토기는 우리나라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것으로 그 형태나 문양(紋樣)에 있어서 다른 지역의 유물과 대비시킬 수 있는 기본적인 지표 자료로 꼽히고 있다.

서울 암사동 유적의 입지와 발굴 조사과정

  • 암사동은 광주산맥(廣州山脈) 줄기인 남한산을 배경으로 하여, 그 북안의 아차산과 마주하며, 한강 본류 남안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넓은 모래사장과 강물이 흘러가는 속도가 비교적 완만하여 예부터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암사동유적은 행정구역 상 서울특별시 강동구 올림픽로 875 번지의 한강 하류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바, 이는 동경(東經) 127°10′북위(北緯) 37°33′에 해당된다. 이곳은 강 건너 북쪽으로는 워커힐과 사적(史蹟) 제234호 아차산성(阿且山城)이 바라보이는 한강 남안 모래사장 일대에 자리 잡고 있는 신석기 시대 대규모 취락(聚落) 유적지이다.
    또 평상시 강변으로부터 700~800m 정도 떨어져 있는 이곳은 강변에 평행하여 동에서 서로 둑의 형상을 이루는 좁고 긴 하천충적대지 즉 자연제방인 바, 이곳을 경계로 강변과 그 반대편인 내지(內地)쪽으로 완경사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곳은 여름철의 집중호우로 인하여 하적토퇴적층이 두터운데, 이 유적도 바로 이러한 강변의 고운 사질토가 기반층을 이루는 좁고 긴 대지와 그 양 경사면에 수만 평의 유물포함층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 암사동 유적이 학계에 알려진 것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인하여 퇴적층이 유실되어 지상에 유물 포함층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즉 이 당시 대홍수로 인하여 한강변 모래언덕 지대가 심하게 패어져 수많은 빗살무늬토기 조각이 노출되면서 그 유적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등전양책(藤田亮策)·횡산장삼랑 등 일본인 학자들에 의하여 지표조사가 실시되었다. 또 이곳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에 대한 연구 역시 간간히 행해져온 바 있었다.

서울 암사동 유적 주민들의 삶

  • 암사동 유적은 신석기 시대 집터로서 제일먼저 알려진 곳이며, 남·북한을 통틀어 가장 많은 집터가 발굴된 취락(聚落) 유적지 가운데 하나이다. 이 유적지의 연대는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에 따르며, 기원전 4000~3000년 경, 곧 지금부터 6000~5000년 전의 주거지 유적으로 추정된다.
  • 주거생활
  • 암사동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신석기 시대 집들은 외형상 지붕과 벽채가 분리되지 않고, 서까래의 밑이 땅에 닿게 만든 움집 곧 수혈가옥(竪穴家屋)이었다.
    즉 움집이란 일정한 넓이와 형태를 가진 구덩이를 파, 집바닥을 땅 밑에 두고, 구덩이 안은 별도의 벽체 시설 없이 서까래가 바로 땅에 닿게 된 집을 일컫는다.
    이 시기 움집터들은 대체로 해안가 구릉(丘陵)이나 큰 강변의 대지(臺地)에 자리 잡고 있었다. 또 이런 집들은 직경 4~6m 크기의 원형이나 말각방형 곧 모를 죽인 방형의 구덩이를 깊이 50~100㎝ 판 다음 노지(爐址:화덕자리)등 내부시설을 마련하고, 지붕을 덮었다. 이 경우 움집은 기둥을 세우고, 긴 나무나 억새풀을 이용하여 그 위를 고깔 모양으로 덮어 씌워 지붕을 만들었다. 곧 이 지붕은 움구덩이 주위에 서까래를 걸치고, 한쪽 끝을 움 중앙에 모이게 하여 골격을 형성하였는데, 서까래 아래 사이에 잔나무 가지나 갈대·억새 등 풀을 이어 덮었던 것이다. 이런 움집은 그 바닥이 원형이면 원추형(圓錐形) 지붕이, 바닥이 방형이거나 장방형이었다면 양면으로 경사가 진 지붕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구덩이 평면이 원형이나 타원형·장방형의 테두리를 둘러 집의 중앙에 설치하고, 보온(保溫)과 취사(炊事)에 사용하였다. 움집의 바닥은 아무런 시설이 없거나 또는 진흙을 깔아 다진 것이었다. 움집의 출입시설이 확인된 것은 계단 모양을 이루고 있으며, 움집 안에서는 풀이나 가죽 혹은 돗자리 같은 것을 깔고 생활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집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바닥 중앙에 한 개의 기둥을 세워 움 상부의 서까래를 받쳐주거나, 네 귀퉁이 가까이에 기둥을 세우고, 기둥 위에 들보를 얽어 그 위에 서까래를 걸쳐주도록 하였다. 지붕 꼭대기에는 연기 구멍을 만들었을 것이다. 아울러 집의 출구에는 계단이나 경사를 만들거나, 사다리를 놓아 출입 시 이용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 생계경제와 식생활
  • 신석기 시대에 들어와 자연 환경이 급변하는 상황 하에서, 인류는 구석기 시대의 저급한 수렵·채집경제라는 ‘식량채집단계(食糧採集段階:food gathering stage)'를 벗어나, 정착생활(定着生活)을 하면서, 원시농경과 목축(牧畜)에 의한 ’식량생산단계(食糧生産段階:food production stage)'로 접어들게 되었다. 또한 인류는 진흙을 빚어 불에 구워 만든 질그릇 곧 토기(土器)라는 새로운 조리(調理)와 저장 수단을 개발·활용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이 토기의 출현은 신석기 시대를 구석기 시대와 구분하는 세계적·보편적 기준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다. 아울러 인류는 돌을 갈아서 보다 정교하게 만든 연모인 마제석기(磨製石器)를 사용하게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세계 인류학계는 이 신석기 시대가 인류문화 발전사의 혁명적인 새로운 전기(轉機)를 마련하여 그 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 시기라 하여, 이런 사실을 ‘신석기혁명(新石器革命:Neolithic Revolution)'이라 지칭하고 있다. 그러나 농경(農耕)을 기반으로 하는 문화들이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동시에 똑같이 발전한 것은 아님에 유의하여야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석기 시대 농경의 적극적인 증거는 현재까지 발견되고 있지 않으나, 도토리 등 야생식용식물과 물고기·조개 등 수산식료의 조리와 저장에 편리한 토기의 제작·마제석기의 사용 및 정착생활이라는 신석기 시대 문화의 특성을 인류사적 차원에서 공유(共有)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신서기 문화란 최초로 토기가 출현한 시기부터 금속기(金屬器) 사용이전까지의 어로(漁撈)·수렵·채집의 생계경제(生計經濟:subsistence economy)를 바탕으로 전개·발전한 토기문화(土器文化)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정의될 수 있다.
  • 서울 암사동 유적의 역사적 의미
  • 암사동 유적의 층위(層位) 구성은 제일 밑바닥이 수형주거지가 있는 밝은 갈색의 모래층이고, 그 위 두 번째 지층이 두께 30㎝ 쯤 되는 불모층(不毛層)이며, 세 번째 층이 즐문토기편과 무문토기편(無文土器片)이 섞여 나오는 회흑색 모래층이고, 네 번째 층이 백제문화층이었고, 맨 위 다섯 번째 층이 모래층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표토층이었다.
    이 사실은 이 암사동 유적지가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를 거쳐 백제 시대로 이어지는 이 땅의 역사 흐름과 그 궤를 같이하며, 당시 주민들의 취락(聚落) 입지로서의 구실을 다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석기 시대 암사동에서 움집들을 짓고 살았던 주민들은 오늘의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 사람들일까? 이 문제는 곧 신석기 문화의 뿌리와 주민의 성격을 밝히려는 노력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종래 우리나라 신석기 문화의 원류(源流)에 관한 여러 논의가 있어 왔다. 먼저 시베리아 전래설은 우리의 신석기문화가 시베리아(Siberia) 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또 그곳의 신석기문화가 우랄(Ural) 지역을 매개로 멀리 북부유럽(Europe) 핀란드(Finland)의 ‘캄케라믹(kammkeramik)’과 우리의 즐문토기의 형태적 유사성에만 집착한 결과로서 비판받고 있다. 더구나 오늘날 우리 고고학계가 즐문토기에 선행하는 원저무문토기(圓低無文土器)와 융기문토기(隆起文土器)를 중심으로 하는 선즐문토기문화의 존재를 확인하게 됨에 따라, 그 입론의 근거를 잃었다. 오늘날 우리 학계는 즐문토기문화에 선행하는 선즐문토기문화의 존재에 주목, 그것과 유사한 그러나 중국 본토나 만주(滿洲) 지역의 신석기 문화와는 분별되는 토기문화가 우리나의 동북 해안지방 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및 흑룡강(黑龍江) 유역 일대에서도 존재했음을 밝혀낸 바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시베리아 및 흑룡강 유역 일대에서도 존재했던 문화의 담당주민은 시베리아의 선주민인 고아시아족(古Asia族:Palio-Asiatics)임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므로 한반도에서 이들과 유사한 신석기문화를 향유한 바 있던 주민들 역시 고 아시아족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신석기 문화 담당주민은 古Asia족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 한민족(韓民族) 형성의 주류를 이루는 Altai어족인 무문토기인(無文土器人) 즉 예맥(濊貊)에게 흡수·동화·통합되어 우리 민족 형성의 한 줄기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 한편 학계 일각에서는 우리 민족형성과정에서, 신석기 시대 즐문토기인과 청동기 시대 무문토기인 사이의 흡수·동화·통합과정에 있어서의 평화적 국면에 주목하는 견해가 있어 눈길을 끈다. 곧 이 견해는 즐문토기문화에서 무문토기문화로의 이행과정에서 상호 간의 문화요소를 교환한 사실을 시사하는 고고학적 자료가 적지 않다고 보고 있다. 그 예로서 즐문토기가 무문토기의 태토(胎土)인 모래·활석가루·석면을 자기의 태토로 채택한 점과 팽이형토기(기원전 7세기 이후 한반도 서북지방의 무문토기)의 구연부에 즐문토기식 사선(斜線) 무늬를 시문한 사실 및 경기도 양주(楊洲) 수석리(水石里) 집자리 유적에서 즐문무늬토기문화 전통의 냇돌을 이용한 석기들의 존재를 꼽고 있다.
  • 따라서 이 견해는 이러한 문화교류가 반드시 평화적인 접촉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인구 사정·두 문화간에 존재하는 기본적 성격에 있어서의 차별성 등을 감안할 때, 두 문화계통 주민이 서로 생존경쟁을 위한 사투(死鬪)를 벌이지는 않은 듯하며, 두 주민간의 혼합·동화, 즉 가까운 지역에서의 평화적 공존(共存)에서 잡거(雜居)로, 그리고 잡거에서 혼혈·혼화(混血·混化)라는 과정을 밟아 무난히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와 시베리아 신석기문화 담당주민의 실체는 고아시아족이다. 이들은 분명히 우리 민족과는 이질적인 존재로서 역사 전개 면에서도 각기 상이한 여정을 밟게된다. 그러나 한국 신석기문화는 시간적으로 청동기 문화와 연결된다. 또 고아시아족의 언어는 청동기 시대를 거쳐 철기문화 단계인 고구려(高句麗)의 언어에 남아 있기도 하다.
  • 이런 점은 한국 신석기 문화가 청동기 문화와 단절적인 것이 아니며, 신석기 문화와 그 담당주민의 영향이 청동기 문화 단계에까지 일정하게 미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고아시아족 계열의 문화 요소는 우리 민족문화 형성과정에 하나의 잠류(潛流)하는 줄기로서 그 문화의 내용을 더욱 다양·풍요롭게 하는데 기여하였던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 그러므로 신석기시대 암사동 유적지에서 살던 주민들은 고아시아족으로서, 비록 오늘 우리와 직접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나마 또 부분적으로 오늘의 우리 겨레 형성과정에 참여하였고, 아울러 우리가 누리는 민족 문화 가운데는 그들의 문화 역시 일부 녹아 있는 것이다. 이점에서 서울 암사동 유적이 가지는 의의는 오늘의 우리와 전혀 관계가 없을 수 없는 신석기시대 사람들 삶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생활고고학 가운데서도 주거지 고고학 상의 주요 유적으로서 자리매김 될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의 서울 암사동 유적 현황

  • 서울 암사동 유적(서울특별시 강동구 올림픽로 875 일대)은 1979년 7월 26일 사적(史蹟) 제267호로 지정되었고, 여러 차례의 유적지 발굴 조사 결과, 총 면적 102,001㎡의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보존되고 있다.
    이 유적지는 유적관람공간과 전시관 그리고 휴식공간·주차장·편의시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 유적관람공간은 9채의 신석기시대 움집이 복원(復原)되어 있고, 전시관은 집터를 발굴된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빗살무늬토기·돌연장·화덕자리 등도 제자리에 놓아 신석기 시대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이용 시민의 불편이 없도록 주차장·산책로 등 편의시설을 완비하여 1988년 8월 준공되었고, 현재에도 매년 많은 관람객이 찾고 있다. 이곳은 개관 이후 인근 주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유치원에서 중·고교생에 이르기까지 단체 관람객들이 입장, 청소년들의 산 교육장으로 구실을 다하고 있으며,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우리의 선사문화를 소개하는 관광명소로도 활용되고 있다.
  • 전시관은 제1전시관과 제2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 제1전시관은 지금으로부터 6000년전 신석기시대 움집터 8기와 저장구덩이 1기를 발굴 당시 실제 그대로 보존처리하여, 그 위에 전시관을 세우고, 출토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형태는 사각추형이고, 규모는 총 면적 1,024㎡(310평)이다. 전시실의 중앙부에는 실제 발굴된 움집터를 경화처리하여 배치하였고, 주변에는 한강의 유적분포·연표·신석기 유적 분포도 등을 패널과 디오라마·출토유물과 함께 전시하여 당시 신석기인의 생활을 재현시켰으며, 우측 통로를 통하여 제2전시관으로 이동 가능토록 하였다.
  • 제2전시관에는 도입부 발굴모형 재현 등 구석기 문화부터 초기 청동기문화와 다른 지방·다른 나라의 선사문화를 비교할 수 있도록 모형·패널·디오라마 등으로 구성하였고, 특히 전시실 중앙 부분에는 움집 생활상을 절개하여 신석기인의 모습과 생활상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앞으로 유물의 교체 전시 등 기획전시를 통하여 서울 암사동 유적 전시관 기능을 확충할 계획이다. 전시관 규모는 총 면적 812.59㎡(246평)이며, 구조체는 집성목을 사용하여 자연감각적 미려함을 살렸으며, 지붕은 경사 슬라브에 산죽을 이어 원시적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 서울 암사동 유적의 발굴조사 성과 개괄
  • 일반적으로 신석기시대 주거지 형태는 원형에서 말각방형, 타원형, 그리고 방형으로 바뀌었고, 말기에 이르러 장방형이 출현하였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황해도 지탑리 제1호가 정방형이므로 이론의 여지가 없지 않으나, 대부분의 평면은 분명히 원형으로부터 시작된다. 전 세계적으로는 신석기시대에 원형 계통과 방형계통이 병존하고 있으나, 한반도에서는 원형계통이 압도적으로 많고, 신석기시대 후기에 장방형의 평면이 나타나기 시작하므로, 발생 전후의 시간차를 나타내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 암사동 유적에서 발견된 집자리는 신석기시대의 전형적인 수혈주거지이다. 이곳에서 발굴된 집자리들 가운데 단편적으로나마 그 형태를 알 수 있는 것은 대략 21기 정도이다.
  • 이들의 평면구조를 보면, 원형(圓形)이 7개, 타원형(圓形)은 1개, 말각방형(抹角方形)이 11개, 장방형(長方形)은 2개로 나타나고 있다.
    이 사실을 보면, 평면 형태는 원형과 말각방형이 각각 7개와 11개로서, 이 형태가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부지방에서는 주로 원형의 수혈(竪穴)이 발견되는데 비하여, 이 지역의 특징적인 형태로 말각방형의 비율이 많은 것은 아마 두 지방 사이에 존재하는 문화적 차별성을 시사해주고 있는 것이다.
  • 그리고 장방형 주거지 2개가 발견·보고된 바, 그 중 하나(72-5호)는 외곽의 평면이 장방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장방형의 수혈 내부에 다시 원형형의 수혈을 판 형태로 지금까지 발견 예가 거의 없는 특이한 모습을 갖고 있어 새삼 눈길을 끈다.
    수혈에는 각각 노지(爐址)가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돌로 시설한 것으로서 그 형태는 원형과 방형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노지(爐址)가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돌로 시설한 것으로서 그 형태는 원형과 방형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노지가 모두 중앙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이점은 청동기시대 수혈의 평면이 대부분 장방형이며, 노지가 벽가에 치우쳐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양 시기간의 문화적 차별성을 짐작케 해주는 사실이다.
  • 곧 신석기시대의 후기에 이르면 수혈주거 안의 공간이 약간 더 넓어지고, 화덕자리는 한 쪽으로 치우쳐 설치되었다. 이는 이 움집 안에서의 생활이 다양화되어, 쉬고 잠자고 식사하는 기능 외에 다른 기능 즉 작업장 같은 장소가 마련되었던 것임을 추정케 한다. 그런데 암사동의 경우, 출입구가 마련되어 있는 주거지에서는 노지의 방향이 대게 남쪽을 향하고 있다.
  • 주공(柱孔:기둥구멍)은 1기의 주거지 내에 상당수 나타나 있지만, 그것들 모두가 동시에 세워진 기둥자리라고 보지 않으며, 기둥을 교체해 나가면서 새로운 구멍을 파내었거나 주된 기둥을 보조해 주는 기둥자리였다. 대개 주공은 한 주거지 당 4개로서, 기둥은 네 모서리에 수직으로 올려지고, 그 위에 들보를 붙들어 매었다.
  • 빗살무늬토기문화
  • 한국 신석기시대 문화가 그 유적의 분포상에 비추어 볼 때, 주로 대동강·한강 유역 및 그 인접 도서(島嶼)를 포함한 서해안 지역, 두만강 유역을 포함한 동북해안 지역, 그리고 낙동강 유역을 포함한 남해안 지역 등 세 개 지역 문화권으로 분별됨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그중 서해안 지역에서 형성·발전된 신석기시대 토기를 서한첨저유형토기 혹은 서한토기라 지칭할 수 있다면, 암사동 유적에서 출토되는 신석기 토기는 이런 서한토기의 한 전형(典型)을 보이고 있다.
    암사동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는 전형적인 빗살무늬토기 곧 즐문토기(櫛文土器)이다. 이 토기의 기형은 직립연부(直立緣部) 즉 곧은 아가리에 첨저(尖底) 혹은 뾰족바닥의 바닥으로 이어지는 포탄형이 기본이다. 바탕흙은 주로 운모(雲母)가 혼입되었으나, 석면(石綿)·활석(滑石)이 혼입된 것도 있다. 기표면(器表面) 즉 그릇 표면은 이(齒)가 하나 또는 여러개로 된 시문구(施文具) 즉 무늬새기개, 곧 단치구(單齒具) 혹은 다치구로 긋거나 눌러서 새긴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구연부(口椽部) 또는 아가리 부분에는 평행밀집사단선문(平行密集斜短線文)·열점문(熱點文)·사격자문(斜格子文)이 주로 새겨졌으며, 기복부(器腹部) 또는 그릇 몸체는 주로 위아래 방향 또는 옆으로 놓여진 어골문(魚骨文)이 새겨졌다. 문양을 새길 기표면을 구연부 즉 아가리부분·기복부·저부(底部)의 세 부위로 구분하여 각각 서로 다른 무늬를 새긴 것이 가장 많고, 구연부와 기복부 이하를 구분하여 서로 다른 문양으로 새긴 것이 그 다음으로 많다. 구연부와 기복부 문양대 사이의 공간에 피상점선문·거이문·구획문·사격자문 등을 새긴 것도 있으며, 구연부에만 문양을 새긴 것도 있다.
  • 암사동에서 출토되는 토기는 구분계전시문형토(區分系全施文形土器)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데, 색상(色傷)은 적갈색이 대부분이나, 황갈색·회갈색·회흑색도 일부 보인다. 이런 것들은 노천요(露天窯)에서 구운 탓으로 불길이 고루 미치지 못하여 생긴 현상으로 추정된다. 우리학계 일각에서는 이렇게 암사동에서 출토되는 것과 같은 특성을 갖는 토기를 총괄하여 서한첨저유형토기 혹은 서한토기라 부르기도 한다. 이 서한토기는 표면에 장식무늬가 아가리부분·몸체부분·바닥에 가까운 부분 등 각각의 몸체 부위에 따른 장식무늬의의 유무와 무늬의 조합(組合) 관계에 따라 3기(期)로 나뉘어진다. 곧 1기는 기원전 5000~3500년, 2기는 기원전 3500~2000년, 3기는 기원전 2000~1000년이다.
    암사동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 이외의 유물(遺物)로는 연석·연석봉·석촉·타제석부·마제석부·괭이·돌낫·보습·속이 빈 원통형(圓筒形) 토제(土製) 및 석제(石製) 어망추 등을 꼽을 수 있다.
  • 이 가운데 마제석부는 미리 적당하게 평평한 역석을 골라 한쪽 끝을 갈아 합도를 만든 것이며, 크기는 10~14㎝ 내외이다. 석촉은 모두 점판암의 마제로서, 유경엽형도 있으나, 대부분은 소위 역자식이다. 평면 신발형의 석기인 돌보습은 국립중앙박물관측의 제4차 발굴시 4호 주거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여기서는 돌낫도 공반되었다. 또 10호 주거지에서는 어깨가 날 부분에 비해 좁은 형태의 굴지구인 괭이가 출토되었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 한강유역은 현재의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의 중서부 일대로서 한강하류의 강북·강남지역을 말한다. 이 지역은 시기에 따라 그 중심부나 포괄지역이 바뀌고 있지만, 대개 백제수도로서의 위례성 부근인 서울-광주권을 지칭하는 것이 통례였다. 선사시대에는 한강하류 일대의 대표적인 선사유적지였고, 백제시대(한성시대)는 현재의 서울 강동구를 중심으로 하는 서울 동남부 일대와 광부 부근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라시대에는 북으로는 양주일대와 남으로는 남양만의 당항진까지를 포함하는 한반도의 중서부를 지칭하였다.
  • 통일신라에 이르러서는 한강유역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지만 그 포괄지역이 예성강 일대까지 이르렀으나, 당시의 정치적 중심지는 아니었다. 그 후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한강유역은 서울 일원의 수도권으로서 정치적 중요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백제 한성시대(漢城時代)의 강동

  •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끼고 그 남북에 위치한 지금의 서울 지역은 옛날부터 선인들의 생활의 터전, 문화의 발상지가 되었다. 특히 삼국시대 초기에 백제가 도읍을 설치하고 나라를 세웠던 곳이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의 건국설화를 살펴보면 북부여를 떠난 주몽이 졸본부여에 정착한 후, 졸본부여 왕의 둘째 딸과 혼인하여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낳았으나, 이들은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은 아들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태자가 되자 그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함께 남하했다. 그 후 비류는 미추홀(彌鄒忽 : 인천)에, 온조는 신하 10명의 보익(輔翼)을 받으며 위례(慰禮)지역(서울 강남)에 정착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한강유역의 지리적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특히 북·동·남의 산악으로 보호받는 분지속에는 나지막한 구릉이 산재하고 있어 생활무대로나 취락형성에 적합한 곳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 곧이어 비류가 죽으면서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온조에게 귀의하였고, 이때부터 국호를 백제로 바꾸었다고 한다. 도읍을 정하기 위해 온조왕이 ‘내가 어제 순행하는 중에 한수의 남쪽을 보니, 토양이 비옥하였다. 따라서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영원히 평안할 계획을 세워야 겠다’하여 천도한 곳은 한성(漢城)이었다. 그런데 시조 온조왕조에서 도읍으로 정한 곳이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다. 따라서 기록을 통해 건국설화 속에 나오는 하남위례성이란 한성을 뜻하는 것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즉 하남위례성에서의 하남(河南)에 있던 한성은 하남위례성이란 표현으로 기록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의례한 욱리하(郁里河)·아리수(阿利水) 등과 같이 한강의 동명이기보다는 책(柵)을 세우고 흙을 쌓아 만든 담의 의미 또는 왕성(王城)·대성(大城)을 위미하는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 한성으로의 천도는 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었다. 즉 성을 쌓고 대궐을 갖춘 도성체제를 이룬 것이다. 또한 한강 서북방에 성을 쌓고 그 곳에 한성 백성들을 나누어 살게 함으로써 왕도의 인구를 분산시킴과 동시에 왕도를 방어할 수 있는 여러 성들을 축조해 방어체계를 구축하였다. 그런데 근초고왕대에 다시 한번 이도(移都) 기록이 보이고 있다. 바로 한산(漢山)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이다. 앞서 한성(漢城)과는 달리 천도란 표현을 쓰지 않고 이도(移都)란 표현을 쓰고 있다. 이것은 영구적인 천도가 아니라 일시적인 이도(移都)였다고 생각된다.
    삼국시대의 도성은 모두 유사시를 대비한 산성을 도성 주위에 두고 있어 도성과 산성이 하나의 처제를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백제에서도 평지성인 한성과 산성인 한산성을 유기적으로 운영하는 왕도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백제 한성시대의 도성은 위례성(慰禮城)→한성(漢城:하남위례성)→한성(漢城)+한산성(漢山城)으로 변화하였다.
  •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후반에 이르는 약 1세기 동안의 한성시대 후기는 백제의 역사상 일대 격동의 시기였다. 대외적으로 고구려의 광개토왕과 장수왕이 남진정책을 계속하고, 백제의 개로왕(455~475)의 패전과 뒤를 이은 문주왕의 남천으로 서울 지역은 고구려의 통치권내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남북으로 국력을 확충하던 고구려는 이곳에 북한산군을 설치하고, 이를 남평양으로도 호칭하였다. 평양을 수도로 하던 고구려는 서울지방을 남쪽의 한 도읍지 또는 백제·신라를 제압하는 거점으로 삼게 되었던 것이다. 대내적으로는 잇따른 왕위계승 분쟁과 이에 따른 진씨(眞氏)·해씨(解氏)·목씨(木氏) 등의 유력한 정치세력의 발호로 인하여 왕권은 극도로 약해지게 되었다.
  • 백제가 대외적으로 고구려 광개토왕의 적극적인 남하공세에 밀려 한강유역에서 패전을 거듭한 시기는 진사왕대부터이다. 진사왕 8년(392) 고구려군의 대규모 공세로 인해 북방의 요새인 관미성을 상실하였고, 아신왕 5년(396)에는 「광개토대왕릉 비문」에서 보듯이 한강유역에 있는 58성 700촌을 고구려군에게 공취당하였다.
    이에 아신왕은 쌍현성을 축조하는 등 고구려와의 전쟁을 적극적으로 독려하였으나 기대하는 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재위 14년만에 죽었다. 이러한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에 대처하기 위해 다각적인 외교책을 강구하였다. 신라와는 비유왕 7년 (433) 에 맺은 나제동맹체제를 기본축으로 하여 고구려의 남진에 대처하였고, 개로왕 원년(455) 에는 신라의 원병과 함께 고구려군을 격퇴하기도 하였다.
    동왕 7년에는 왕제 곤지를 일본 하내의 긴비조에 파견하여 유사시에 청병을 대비하여 외교관계를 긴밀히 하였으며, 물길과도 연합하여 고구려 측변에서 견제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대고구려 봉쇄망을 형성하려는 백제의 전략은 도리어 고구려를 자극시켜 그 침입을 초래하는 결과가 되었다.
    결국 개로왕 24년(475) 9월 고구려의 장수왕은 3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갑자기 들이닥쳐 왕도인 한성을 7일만에 함락시켰던 것이다.
    이 전쟁으로 인해 백제는 영토의 손실과 함께 막대한 인적ㆍ물적 손실을 입게 되었다. 개로왕 자신뿐 아니라 태후ㆍ왕자들이 고구려군에 의해 살해되었고, 8천여 명의 인민이 포로로 끌려갔으며, 한성을 포함한 한강유역 일대를 송두리째 고구려에 빼앗기게 되었다

고구려 세력의 강동지역 진입

  • 고구려세력의 한강유역 진입으로 한강유역이 삼국의 각축전에서 중심지로 떠오르게 되었다. 고구려는 475년 한강유역을 점령한 후 551년에 신라와 백제에 의해 한강유역을 상실당하기까지 이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왜 고구려는 한강 유역의 진출을 위해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반까지 백제와 치열한 전투를 치렀을까.
  • 4세기 초 요동지방에 대한 진의 행정력이 약화되어 모용씨가 요동지방을 차지하자 고구려는 중원으로의 세력확장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4세기 전반 고구려도 요동으로의 진출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었으며, 후조에 사신을 보내어 양국 사이에 있는 모용씨에 대한 협공을 논의 하였다. 따라서 모용씨의 전연은 중원으로의 진출을 위해 고구려를 견제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하여 고국원왕 9년 (339) 과 12년 (342) 에 전연왕 모용황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아 국도 환도성이 함락되고 선왕 (미천왕) 의 묘가 파헤쳐졌으며 왕모와 왕비가 포로로 잡혀가는 등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로 말미암아 고구려의 요동 진출 노력은 좌절되었고, 이후 40여 년간 고구려는 요동 지방으로의 진출을 시도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따라 고구려는 4세기 초 낙랑군과 대방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하고, 비옥한 농경지를 끼고 있거니와 인구조밀지역이기도 한 한반도 중부지역에 대한 장악을 시도하였다. 반면 백제는 4세기 중엽부터 국력이 크게 팽창하는 단계에 올라서게 되었으므로, 그 힘은 남쪽의 영산강유역과 동쪽의 낙동강유역에 각각 미치게 되었다. 이러한 판세에서 백제의 힘은 자연 북쪽에 위치한 고구려와의 대결로 집중되는 양상을 띠었다.
  • 고구려의 남진과 한강유역 진출 과정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번째는 고국원왕 39년 (369) 에 고구려가 2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백제의 치양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백제 근초고왕의 반격을 받아 오히려 수곡성 북방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는 고국원왕 41년에 재차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또 다시 패배하고 평양성에서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하였다.
    고구려 한강유역 진출의 두 번째 단계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후반에 이르는 시기로 약 1세기 동안의 기간에 양국은 예성강과 임진강 유역에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우호관계를 유지해오던 백제-신라간의 관계가 백제 독산성주의 신라 도망사건을 계기로 하여 갈등을 빚게 되었고, 새로이 고구려-신라간의 우호관계가 성립되었다. 이러한 변화가 고구려의 대백제공략전에 유리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변화가 고구려의 대백제공략전에 유리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광개토왕은 즉위하면서부터 백제공격에 나섰다. 광개토왕은 즉위 6년에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여 아리수를 건너 백제왕성을 공격하니 백제 아신왕은 남녀 1천 명과 세포 1천 필을 바치고 ‘앞으로 영원히 고구려의 노객이 되겠다’ 고 맹세하였다.
  • 고구려에 의해 국도가 공격당하는 등의 피해를 입은 백제는 왜ㆍ가야등과 연합하여 대항하였다. 백제는 아신왕 6년 (397) 왜에 태자 전지를 파견하여 왜와의 연합을 구체화시켰다.
    이어 백제는 몇 차례 고구려 침공을 기도하였고 왜ㆍ가야 연합군으로 하여금 신라를 공격케 하였으나, 광개토왕의 반격으로 오히려 고구려군이 신라ㆍ가야지역까지 진출하였다. 이후에도 백제는 왜와 함께 고구려 영토인 대방군 고지를 공격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 광개토왕을 이은 장수왕은 중국방면에서의 정치적 안정으로 인하여 西進에 한계를 느끼고, 동왕 15년 (427) 평양천도를 통하여 남진정책을 본격화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백제와 신라는 433년 우호관계를 맺어 고구려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5세기 후반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의 우호적인 관계가 구체화됨에 따라 양국을 번갈아 가며 공격하는 등 남진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5세기 말까지의 전투양상을 『삼국사기』에서 추출해 보면 대백제전이 4회, 대신라전이 8회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신라의 이탈을 경계한 고구려가 신라를 주요한 공격대상으로 삼았음을 짐작케 한다.
    장수왕 43년 (455) 고구려가 백제를 침범하자 신라 눌지왕이 백제에 구원병을 파견하면서 시작된 양국의 군사동맹은 이후 자비왕 18년 (475) 장수왕의 백제 공격시에 신라가 1만명의 구원병을 파견해 주었고, 또한 장수왕 69년 고구려의 신라 침입시에도 백제가 가야와 연합군을 편성하여 파견하는 등의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났다. 또한 백제는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통하여 고구려에 대한 봉쇄전략도 추진하였다. 백제 개로왕은 북위에 국서를 보내어 고구려의 남침에 따른 군사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는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였고, 오히려 고구려의 대대적인 침공을 불러 일으켰다. 격분한 장수왕은 63년 9월에 3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백제와 신라의 군사적인 연합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장수왕은 그 63년에 백제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살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69년에는 신라를 침범하여 미질부 지역까지 진출하는 등 백제ㆍ신라에 군사적 압박을 계속해 나갔다.
  • 한강유역은 475년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으며, 나ㆍ제 연합군에 의해 한강유역을 백제가 되찾은 551년까지 76년간 고구려가 점유하였다. 임진강유역에서 한강유역에 이른 지역에서 최근 많은 고구려 유적이 조사되고 있는 것이 이러한 정황을 뒷받침하고 있다. 임진강유역에는 강북으로 여러 곳의 산성과 토성이 마주보고 있으며, 이중 강 북안에서는 호로고루와 당포성, 무등리성, 은대리성 등의 고구려 유적이 확인되고 있다.
    한강 북안의 고구려 유적은 아차산 일원에서 확인되는데, 초기에는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남하하던 고구려 군대의 전초기지로 축조되었으며, 나중에는 북상하는 백제와 신라를 맞아 대항하던 방어기지로 사용되었다.
    지표조사를 통하여 밝혀진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유적은 15개소에 달하는데, 조사전에 파괴된 것을 감안한다면 이보다 많은 수의 유적이 있었을 것이다. 이들 고구려 보루는 한강 북안에 여해 있는 구의동보루에서 아차산과 용마산 능선을 따라서 이어지고 있으며, 멀리 망우리 일대를 통하여 북으로 연결되고 있다. 이들 유적은 능선상의 작은 봉우리를 중심으로 원형 또는 장타원형의 석축 성벽을 쌓은 형태를 하고 있으며, 내부에는 군사용 막사건물을 비롯한 건물이 축조되어 있다. 이들 보루들은 아차산과 용마산 줄기를 따라 2줄로 배치되어 있으며, 보루들 사이의 거리는 400~500m가량으로 비교적 일정한 편이다. 구의동보루 발굴 당시 유적 아래쪽 능선에 목책 구덩이로 보이는 시설이 확인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각 보루는 목책 등의 시설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특히 구의동유적은한강 북안에 위치한 고구려의 군사요새 중의 하나로 주변에 선사시대 유적은 물론이고 아차산성, 풍납토성, 몽촌토성, 석촌동고분군, 가락동고분군, 방이동고분군 등의 삼국시대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유적은 원형의 성벽과 그 내부의 건물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성벽의 남쪽 두 곳에는 네모나게 밖으로 돌출된 곳이 있다. 이들 돌출부는 동서로 긴 장방형이다. 이 돌출부 시설은 한강이남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가리키고 있으며, 고구려 성광에서 흔히 보이는 방어시설인 치와 같은 기능을 하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지는 7기가 확인되었다. 모두 장방형 편면으로 벽체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돌과 점토를 섞어 쌓았고, 그 위에 맛배식 지붕이 덮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중 1호 건물지는 유적이 가장 남쪽에 있으며, 다른 건물지와는 달리 장축이 동서 방향이며, 다른 건물들보다 1.5m 정도 높은 위치에 있다. 바닥은 잘 보존되어 있었으며, 온돌 주변에서 1점의 명문토기를 포함하여 30여 점의 토기와 많은 양의 철기가 출토되었다.
    3호 건물지는 이 유적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지이다. 건물지의 네 벽은 모두 할석과 점토를 섞어서 쌓았으며, 동벽 가운데에 문을 달았던 문비석이 1점 놓여 있어서 이곳에 주 출입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몽촌토성은 백제 한성시대 (기원전 18년 ~ 서기 475년)의 중요 거성의 하나로 추정되고 있다. 성곽이나 성내부 시설물들은 대부분 백제에 의해 축조되고 사용된 것이지만, 토성의 서남지구 고지대에서 고구려의 온돌 건물이 조사되었으며, 고구려토기도 다수 출토되었다.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나팔입항아리는 전형적인 고구려 중기의 양식으로 5세기 중ㆍ후반 경으로 편년된다. 반면에 구의동보루나 아차산 4보루에서는 모두 실용기가 출토되는데, 이러한 점은 몽촌토성에 거주하였던, 고구려인들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으로 중요하다. 이러한 점은 몽촌토성에 거주하였던 고구려인들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으로 중요하다. 즉, 몽촌토성에는 구의동이나 아차산 일대의 보루 유적보다는 비우 있는 인물이 거주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군사적인 성격 이외의 행정관이 파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474년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시킨 고구려 군은 백제의 개로왕을 아차성 밑에서 살해한 후 몽촌토성에 주둔하고, 계속 남한강유역으로 남하를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4세기 말에서 5세기 중엽에 리는 고구려의 남진은 임진강유역과 한강유역에 걸친 방어선을 뚫고 이루어진 것으로 5세기 후반에는 한강을 건너 한강 남쪽의 한성백제 중심지를 차지하게 된다.

신라의 강동지역 진입

  • 신라는 지증왕ㆍ법흥왕대에 이르러 고대국가의 체제를 완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진흥왕대 (540~576) 에는 정복국가로 발전하고 있었다. 신라의 진흥왕대는 고구려의 안원왕ㆍ양원왕ㆍ평원왕대에 해당하는 시기로 왕위계승 문제 국력이 쇠약해져 있던 시기이다.
  • 백제는 성왕과 위덕왕대로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유역의 영토회복을 꾀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 세력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한강 상ㆍ하류의 고구려의 영토를 취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백제가 차지한 한강하류지역마저 차지하여 신주를 설치하고,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나아가 백제와의 전면전에서 승리한 여세를 타 가야지역까지 완전히 장악하여 광범위한 영토 확장을 꾀하였다.
  • 진흥왕이 등장할 무렵 고구려는 와위계승 문제로 왕실의 내분이 일어나 국내정세가 불안한 시기였다. 한편 이 무렵 백제는 성왕이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고, 밖으로 양에서 새로운 문물을 흡수하였으며, 왜와도 친선을 두터이 하였다. 그리고 신라와는 가야지역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기도 하였으나 전반적으로 고구려의 남하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진흥왕 11년(550) 백제와 고구려가 도살성과 금현성에서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틈을 타 이사부가 두 성을 빼앗았다. 이는 모두 한강유역으로 진출하는 요충지가 되는 곳으로 이 지역의 확보를 위해 고구려와 백제가 공방을 벌이는 동안 신라가 이를 모두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 진흥왕 12년(551) 신라와 백제는 한강유역의 공격에 나서게 된다. 신라는 거칠부 등 여덟 장수를 보내 죽령 이북 고현 이내의 10개 군현을 탈취 하였고, 백제는 평양을 격파하였다. 이번 군사행동에서도 역시 백제가 고구려의 평양을 먼저 공파하자, 신라는 그 승세를 타고 죽령 이북의 10군을 공략한 것이다.
    6세기 전반 고구려의 군사적 압박을 극복한 시라 세력의 팽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551년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파악되는 단양신라적성비이다.
    이 비는 신라가 6세기 전반의 어느 시기엔가 죽령을 넘어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안양 지역을 공취하고 적성산성을 경영했음을 알려준다.
  • 그리고 백제가 공취한 지역에 대해 『일본서기』 흠명천황 12년조에 한성ㆍ평양 등의 6개 군을 취하였다고 했으니 이는 한강 하류지역으로 현재의 서울을 포함한 지역일 것이다. 이로써 백제는 고구려에게 빼앗겼던 한강유역의 옛 땅을 되찾게 된 것이다.
    나제 동맹군이 한강유역에 진출함으로써 고구려의 대 나 ㆍ제 전선은 중원 고구려비의 건립 이후 최대로 북상되었다. 더욱이 양원왕 8년(552) 부터 벌어진 서부 및 북부 국경선 방면에서의 거란ㆍ돌궐과의 압력과 분쟁으로 고구려는 더욱 여력이 없었다.
  • 『삼국사기』에 따르면 551년 신라와 백제의 동맹군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수 유역을 분할 점령하였으며, 2년 뒤인 553년 신라는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554년 백제는 대가야군 및 왜와 합세하여 신라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에 나섰다. 결국 554년 백제는 대가야군 및 왜와 합세하여 신라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에 나섰다. 결국 554년 나ㆍ제간의 관산성 회전은 나제동맹 와해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이며, 이후 신라의 한강유역 영유는 부동의 기정사실화가 되었던 것이다.
    새로이 확보한 한강유역을 통치하기 위해 신라는 이 지역에 신주를 설치하고, 진흥왕 16년(555) 에는 왕이 친히 북한산에 순행하여 강역을 확정지었는데 현재 서울에 있는 진흥왕의 북한산비는 이 때에 세운 것이다.
  • 동왕 18년에는 신주를 폐하고 북한산주를 두었으며, 동왕 29년에는 북한산주를 폐하고 남천주를 설치하였다가 진평왕 16년(594) 에는 남천주를 폐하고 다시 북한산주를 두었다.
    이렇게 자주 주를 폐하고 설치한 것은 주의 주치를 옮긴 데 지나지 않는데, 신라로서는 한강유역을 실질적인 중심지로 육성하고자 했던 것이며, 북진정책의 기지로 삼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 한편 백제는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다시 찾기 위하여 여러 차례 신라의 북변을 참입하였다.
    신라의 한강 유역 점유는 경제적ㆍ군사적 팽창의 계기가 되어 대가야정벌로 결실 되었다. 더구나 한강 유역은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에 있어서 최후로 당군을 축출시킨 곳으로 통일신라는 한강유역에 큰 정치적 비중을 두었다.
    신라는 통일후 정치적 안정에 따라 한강 유역에 대한 관심이 지역적 범위를 넓혀 갔다.
    신라의 한강유역 점유의 또 다른 정치ㆍ군사적 의미는 바다를 통한 대중 통로의 확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고구려나 백제는 이 지역을 상실한 후 당항성을 통한 신라의 대중 통로를 번번이 차단하였던 것이다. 활동을 통해 국가를 수호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므로 백제는 항상 서해안 일대를 봉쇄하여 신라인의 대중교섭을 저지하려 했다.
    따라서 한강유역의 정치ㆍ군사적 의미를 궁가 흥망의 관건이라고 보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여기서 우리는 한강유역이 지닌 정치ㆍ군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강동과 관련된 고려시대 광주의 연혁과 산물

  • 서울특별시 강동구 지역은 백제시조 온조왕이 위례성을 한강 남쪽에 쌓아 수도를 삼으면서 정치적,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이 위례성은 강동구와 인접한 몽촌토성 일대에 위치했었다는 설, 강동구와 인접한 하남시 이성산성·춘군동 일대에 위치했었다는 설 등이 있어 왔다. 근래에는 몽촌토성 근처의 풍납토성에 대한 발굴이 진척되면서 풍납토성 일대에 백제 초기의 도읍이 자리잡았으리라는 주장이 각광을 받고 있다. 백제 초기의 수도가 어디에 위치했었던지 강동구는 백제 초기의 수도 내지 수도권에 속하였던 것이다.
  • 온조왕은 즉위한 지 14년이 되는 해에 수도를 ‘한산(漢山)’으로 옮겼는데 이를 『고려사』지리지에서는 남한산성으로 파악하였다. 백제 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도 16년에 ‘한산’으로 천도하였는데 『고려사』지리지에서는 이를 남평양성으로 파악하였다. 백제가 남한산성으로 천도한 시기는 명확치 않지만 그러한 사실은 인정해도 될 듯 싶다. 남한산성 천도는 이후 남한산성과 그 북쪽 지역(하남시 춘궁동)이 이 일대의 중심지로 떠오르도록 만들었다는 의의가 있다.
  • 그런데 백제의 왕도(王都) “한성”은 고구려의 공격을 함락당하고 개로왕이 전사하였다. 이에 따라 백제가 남쪽으로 수도를 옮기고 대신 고구려가 한강 일대를 장악하면서 강동구 지역은 고구려 남진의 전략적 요충지로 변화하였다. 그후에는 신라가 고구려를 몰아내고 한강유역을 차지하면서 신라 북진의 전략적 요충지로 중요시되었다. 그리고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인 문무왕 때 한강 일대에 한산주(漢山州)를 설치하였으며, 중간에 남한산주로 고쳤다가 경덕왕 15년에 한주(漢州)로 개칭하였다. 한주의 영역은 한강 이남은 물론 이북도 아우르는 광범한 지역으로 오늘날의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 일부 지역에 걸쳐 있었다. 그런데 이 한주의 중심 지역은 ‘광주(廣州)’로 불려졌으며 읍치는 강동구의 남쪽에 맞닿는 하남시의 춘궁동 일대 혹은 남한산성으로 여겨진다. 강동구 지역은 넓게는 한주, 좁게는 광주의 중심권에 속하였다고 할 수 있다.
  •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은 23년(940년)에 지방제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면서 오늘날의 강동, 하남을 중심으로 하는 한강 이남 지역을 광주로, 그리고 한강 이북을 양주(楊洲)로 정하였다. 제6대 성종은 2년(983)에 처음으로 12개의 목(牧)을 설치해 지방관을 파견하였는데 광주도 그 중의 하나에 해당하였다.
    그러니까 광주는 광주목이 되고 목사(牧使)가 파견된 것이다. 성종14년(995)에는 10도(道)가 신설되었으니 우리나라 처음으로 ‘도(道)’제가 시행된 것이었다. 이때 12주목(州牧)은 12군(軍)으로 개편되고 목사 대신에 절도사(節度使)가 파견되었다. 이에 따라 광주는 봉국군(奉國軍)이라 불려져 절도사가 파견되었으며 10도중 관내도(關內道)에 소속되었다. 현종 3년(1012)에는 절도사가 폐지되고 대신 5도호(都護)와 75도(道) 안무사(安撫使)가 설치되는데 광주에도 안무사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현종 9년(1018) 안무사를 혁파하고 4도호 8목이 설치될 때 광주는 8목의 하나로서 광주목이 되고 목사가 파견되었다. 이로써 광주는 가장 중요한 지방 행정 단위인 8개의 목 중의 하나로 굳건히 자리매김하였던 것이다.
  • 고려 지방 구획의 큰 단위로 보통 북방의 양계(兩界)와 남방의 5도를 든다. 안찰사(관찰사의 전신)가 파견되는 5도제는 제16대 예종 무렵에 대략 윤곽을 드러냈다.
    중부지역은 양광도(楊廣道) 혹은 충청도(忠淸道)로 일컬어지다가 전자가 대세를 점하게 된다. 그런데 양광도는 바로 양주와 광주가 합쳐진 용어였으니 이를 통해서도 광주가 이 지역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이 건국되고 수도가 한양에 정해진 후에도 광주는 소속이 양광도에서 경기도로 되었을 뿐 큰 변화는 없었다.
  • 고려시대에는 지방관이 파견된 주군(主郡)·주현(主縣)이 있었으며,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한 속군(屬郡)·속현(屬縣)이 있었다. 도의 장관인 안찰사는 조선시대 도의 장관인 관찰사보다 자신이 파견된 지역에 대한 장악력이 약하였다. 조선시대 관찰사는 재상급에 임명되었지만 고려시대 안찰사는 5~6품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안찰사보다 오히려 품질이 높은 3품 이상의 관직자가 임명되는 경·도호부·목의 장관이 계수관(界首官)이라 불리며 중앙과 군현을 중개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지방행정은 주군·주현이 독자적으로 중앙과 연결하여 처리하였으며,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계수관을 통하기도 한 반면, 안찰사는 자신이 관할하는 도를 돌아다니며 감찰하는 역할을 주로 담당하였다. 그러니까 강동 구민들은 양광도 안찰사의 감찰을 받았지만 오히려 주군·주현의 장관이자 계수관인 광주목사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있었던 것이다.
  • 고려시대의 광주는 오늘날의 강동구, 송파구, 강남구, 경기도의 하남시, 광주군, 성남시 일대를 포괄하는 지역이었다. 천녕군(여주군 홍천면), 이천군, 죽주(안성군 이죽면), 과주(과천 일대), 용구현(용인 일대), 양근현(양평읍) 등의 속현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광주는 더욱 광범위하였다. 광주에 관한 기록의 대부분은 그 안의 구체적인 지역을 가리키기보다 그냥 ‘광주’라 하여 포괄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래서 그것이 강동구 지역과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조선후기에 ‘면(面)’이라는 지방행정 단위가 체계적으로 시행되었을 때 강동구 지역은 광주목의 구천면(龜川面)에 해당하였다. ‘면’제가 실시되지 않은 고려시대에 ‘광주’라 언급된 경우 그것이 강동구 지역과 관련되는지 판단하기 쉽지 않은 것이다. 강동구 지역과 명백히 관련이 없는 것으로 밝혀지지 않는 한 ‘광주’로 나오면 일단 소개대상을 삼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고려시대 광주의 읍치(邑治)가 어디에 있었는지 명확히 밝히기는 어렵지만, 조선 후기 인조4년(1626)에 남한산성 안으로 옮기기 전까지는 조선시대와 같은 지역에 위치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중기에 쓰여진 『동국여지승람』의 광주목에 따르면 덕풍역은 주 북쪽 5리에, 일장산(남한산)은 주 남쪽 5리에, 검단산은 주 동쪽 7리에, 망월봉은 주 서쪽 10리에 자리잡고 있다고 되어 있다. 이로 보아 ‘주(州)’ 즉 광주의 읍치는 지금의 하남시 춘궁동 일대에 자리잡지 않았나 싶다. 검단산이 광주의 진산(鎭山)으로 기록된 점도 그러할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 광주의 관청 소재지에 대해서 이색의 아버지 이곡(李穀)이 쓴 ‘청풍정기’가 참고된다. 이곡은 충정왕 원년(1349)에 고향인 한산(韓山 : 충남 서천군 한산면)을 다녀왓는데 개경에서 내려갈 때와 고향에서 개경으로 올라올 때 광주 지역을 경유하였다. 내려갈 때 한강을 건너 낙생역(樂生驛 : 현재 성남시 수정구 시흥동)에 이르렀다. 목표지가 서해안의 한산이었으므로 광주 치소 근처에 위치한 덕풍역 쪽으로 가지 않은 것이었다. 이곡의 남행을 안 광주목사 백문보(白文寶)가 낙생역에 사람을 보내 관사의 북쪽 절경에 자리잡은 옛 ‘청풍정(淸風亭)’터에 정자를 새로지었으니 와서 기(記)를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직산(천안군 직산면)사람인 백문보는 이곡과 함께 대학자 이제현이 주관한 과거에 급제한 동년(同年)이었다. 이곡은 고향길이 바빠 올라오는 길에 들르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 올라오는 길에 광주 치소를 들렀는데 백문보는 이미 개경으로 돌아갔고 대신 친우 이군(李君)이 새로운 광주목사로 부임해 있었다.
    이곡은 청풍정에 올라 주변경치를 둘러보고는 “광주의 주(州) 됨은 삼면이 모두 높은 산이고, 북쪽은 비록 광원(曠遠)하나 지세가 평평하고 낮아 관청과 민가가 마치 우물아래에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청풍정은 후에 광주목사 홍석(洪錫)에 의해 청풍루(淸風樓)로 탈바꿈하는데 객관의 동북쪽에 위치한다고 되어 있다.
    이곡의 아들인 대학자 이색도 광주를 들른 적이 있는데 “ 사면의 구름낀 산이 관사를 감싸고 한 줄기 강물이 어대(漁臺)를 감돌아 흐르네”라고 읊었다. 이러한 표현들은 동쪽에 검단사, (서쪽에 이성산), 남쪽에 남한산, 동남쪽에 용마산 등으로 둘러싸인 춘궁동 일대를 묘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춘궁동 일대는 강동구 상일동을 넘어서면 맞닥뜨리는 곳이니 강동구 지역은 광주목의 중심권에 속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 고려시대에는 개경 이남의 경우 개경에서 동경(경주)를 잇는 교통망이 가장 중요하였다. 제1로는 개경→ 청교역→양주→평구→원주→단양→죽령→안동→영천→동경이었다. 제2로는 개경→청교역→남경(한양)→광주→이천→충주→계립령→문경→상주→해평→대구→동경이었다. 제3로는 개경→청교역→남경→용인→양지(용인군 내사면)→죽산(안성군 이죽면)을 거쳐 충주에서 제2로와 합쳐졌다. 고려 때는 제1로와 제2로가 제3로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광진을 통과해 강동구 지역을 거쳐 덕풍역이나 경안역 방향으로 내려가는 제2로가 더욱 중요시되었다. 이처럼 강동 일대는 고려시대에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이 주로 거쳐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고 말할 수 있다.
  • 문종21년(1067)정월에 2,800간이나 되는 유명한 흥왕사가 낙성되어 그것을 기념하는 연등대회가 5일 밤낮 동안 펼쳐졌다. 그런데 이때 광주는 왕의 칙명에 따라 백사(百司), 안서 도호부, 개성부, 수주(수원), 양주, 동주(철원), 수주(부평), 강화현, 장단현과 함께 이 행사에 동원되었다. 동원된 사람들은 대궐 뜰에서부터 흥왕사의 문까지 시렁대인 채붕(綵棚)을 서로 연달아 얽어 잇닿게 하였으며, 왕의 행차길 좌우에 등을 밝힌 인공산과 횃불을 밝힌 인공나무를 만들었다. 보통 강화, 장단 정도까지가 수도 개경 주변의 수도권이라 할 수 있는데 거기에서 조금 벗어난 광주와 그 인접지역 사람까지 차출되었으니 흥왕사 낙성 축하행사가 얼마나 거대하게 열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때 강동 지역 사람들도 차출되어 이 행사에 동원되었을 것이다.
  • 양주에 남경이 설치된 후에는 광주가 남경의 수도권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의종21년(1167)8월에 왕이 남경에 행차한 후 가돈원(加頓院)에 이르렀을 때 광주에서 의장대와 악대를 갖추어 어가를 맞이하고 말 2필, 견여(肩輿)1개, 양산 3개를 바쳤다. 광주는 지방행정 중심지인 8목의 하나였으므로 국가의 가장 중요한 행사인 팔관회 때마다 축하사절을 보냈다. 고종 40년(1253) 11월 국왕이 팔관회를 개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을 때 여러 도에서 축하하는 표문을 올린 곳은 몽골과의 병란으로 인해 남경(한양), 광주, 수주(부평) 뿐이었다 한다. 이는 막대한 피해를 입은 몽골과의 항쟁기간에도 광주가 어느 정도 제 기능을 수행하혔음을 말해준다.
  • 고려시대 사정이 상당히 반영된 『세종실록지리지』광주목에 따르면 비옥한 토지와 척박한 토지가 반반이라고 하였다. 이 중 비옥한 토지에 해당되는 지역의 대부분은 낮은 구릉과 광활한 평야지대가 펼쳐지는 남한산 이북에 위치한다. 특히 강동구 지역을 포함한 한강 연안 지역은 한강이 범람할 때마다 축적된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물로 고려시대에도 벼농사가 많이 지어졌으리라 여겨진다.
    그런데 풍부한 수자원을 갖고 있는 광주 지역에도 가뭄으로 고통을 겪은 적이 더러 있었다. 고려 문종 11년(1057)에는 음력 5월 예부가 아뢴 바에 따르면 초여름부터 비가 오지 않았는데 특히 광주는 전야(전야)가 건조하여서 거의 흉년을 면치 못할 듯 하다고 하였다. 이 가뭄에 대한 대처로 송악, 산천, 박연 등에서 비를 기원하는 기도제가 행해졌으며 광주에서도 기우제가 행해졌다. 이것이 효험이 있었는지 열흘만에 비가 내려 광주 사람들도 기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문종 18년(1064) 11월에 호부가 아뢴 바에 따르면 광주목은 봄부터 가을까지 오랫동안 가물어 비가 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우박까지 거듭 내려 수확할 화곡(禾穀)이 조금도 없었다. 광주 사람들은 최악의 기근에 직면하였던 셈인데 이에 대해 정부는 양전(量田)을 정지하는 조치를 취하지만 그 외에 어떤 구휼정책을 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처럼 광주지역은 고려 문종 때 가뭄으로 최악의 위기를 맞았었는데, 그래도 강동구 지역을 포함한 한강 연안 지역은 강물을 끌어들일 수 있어 다른 지역에 비해 피해가 적었을 것이다. 반면 강동구 지역은 고려시대에도 한강의 범람으로 인한 홍수피해를 종종 입었을텐데 확인할 수는 없다.
  • 『세종실록지리지』 광주목에 따르면 광주의 토의(土宜)로 오곡, 잡곡, 대추, 옻(칠), 닥나무, 완(왕골), 뽕나무를 들었다. 토공으로는 진즙(띠, 짚), 지초(芝草), 약재로는 우여량(禹餘粮), 안식향(安息香), 사자족(獅子足), 애현(艾玄), 호색(胡索), 진봉0, 토산(土産)으로는 은구어(銀口魚)를 들었다. 또한 자기소(磁器所)와 도기소(陶器所)가 여러 개 실려있다. 『동국여지승람』 광주목에는 토산으로 사(絲), 마(麻), 자기, 도기, 은구어, 눌어(訥魚), 금린어(錦鱗魚), 해(게)가 실려 있다. 이러한 광주 지역의 산물에는 조선전기만이 아니라 고려시대의 사정도 어느정도 반영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조선시대에는 광주에 사옹원의 분원(分阮)이 마련되어 광주 일대는 관청에 도자기를 공급하는 도자기의 중심 산지가 된다. 이처럼 광주가 도자기의 산지로 발전하게 된 계기는 이미 고려시대 때 마련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고려 충렬왕 3년(1277) 5월에 중 육연을 강화에 보내 유리 기와를 굽게 하였다.
    그런데 이 방식에는 많은 황단(黃丹)이 사용되었으므로 광주 의안의 흙을 취하여 구워서 만들었다. 품색이 남상 즉 중국 남쪽의 상인이 파는 것보다 나았다 한다. 이를 통해 광주에서는 도자기나 기와를 굽기 위해 사용되는 최상의 흙이 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또한 도자기 공업이 상당히 발전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고구려시대 강동 지역의 역사

  • 통일신라가 약화되면서 전개되는 후삼국의 전란 시대에 광주 지역은 영웅들이 차지하고 싶은 전략적 요충지로 떠올랐다. 원주의 양길 밑에 있다가 명주(강릉)에 입성하면서 독립한 후 철원에서 나라를 세우고 송악으로 수도를 옮겨 ‘고려’를 칭한 궁예에게 특히 그러하였다. 고려는 광주 지역을 손에 넣지 않으면 남진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궁예는 900년에 왕건에게 명해 광주, 충주, 청주, 당성(화성군 남양면), 괴양(괴산)등의 군현을 공략하도록 하였으며 왕건은 그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이후 광주는 궁예의 ‘고려’, 왕건의 ‘고려’에서 남진할 때 거쳐가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의
  •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리고 고려가 후삼국의 통일을 완수한 이후에는 수도 개경에서 남쪽으로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 거란족 요나라의 침략으로 개경이 위험해지자 현종은 원년(1010년) 말에 나주를 향해 피난길에 올랐는데 역시 광주를 경유하였다. 왕은 임진강을 넘어 적성현 단조역과 창화현을 거치는 동안 반란자들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처하였다. 이를 극복하고 다음해 정월에 광주에 이르러 머물렀는데 신하들이 많이 도망하여 수행하는 자들이 적었으며 두 왕후는 행방불명되었다가 요탄역에서 찾을 수 있었다. 거란군이 계속 남하하였으면 교통의 요충지인 광주 지역이 먼저 피해를 당했을 터이지만 다행히 한강 이남으로 내려오기 전에 격퇴당하였기 때문에 강동구 지역을 포함한 광주 지역은 무사할 수 있었다.
  • 여진족 금나라의 지배를 받던 거란족이 몽골에 쫓겨 고종 3년(1216)부터 고려를 침략하였다. 이 거란족은 고종 6년에 평양 부근의 강동성에서 포위당해 항복하였지만 그 여파는 상당기간 존속하여 사회분위기가 어수선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를 틈타 최우 무신정권기인 고종 9년에 진위현(현재 평택군 진위면)사람인 영동정 이장대와 직장동정 이당필이 같은 현 사람 별장동정 김례와 함께 봉기를 일으켰다. 그들은 많은 무리를 불러모아 현청을 습격하여 현령의 신표를 겁탈하였으며, 창고를 열어 구휼하니 촌락의 굶주린 사람들이 많이 호응하였다 한다. 그들은 인접한 고을에 통문을 보내 스스로 정국병마사, 자신의 무리를 의병이라 칭하였다. 그들이 장차 광주를 침입하려 하자 왕은 낭장 권득방, 산원 김광계 등을 보내 안찰사 최박과 함께 광주와 수주(수원)의 군사를 발하여 치게 하였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당시 강동구 지역을 포함한 광주인들은 봉기군에 호응하는 사람과 봉기군을 진압하는 사람 양쪽 모두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니 선택의 기로에서 마음 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중앙정부는 충주, 청주, 양주 방면의 군사까지 동원하고서야 봉기군을 진압할 수 있었다.
    고려의 거의 전 지역이 전장으로 변하는 몽골군의 침략때는 광주 지역이라고 예외가 아니었으며 교통의 요충지라 우선 공격대상이 되었다. 몽골군의 침략은 고려 고종 18년(1231)부터 시작되었다. 『고려사』권80 식화지 3 진휼조에는 광주가 신묘년(고종18년)과 임진년(고종 19년)에 몽골군에게 포위공격을 당했으나 굳게 지켜 함락당하지 않았으므로 요역 징발을 면제한다고 되어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광주 지역 사람들이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의 1차 침략과 2차 침략을 굳세게 막아내 승리했으며 그 공을 포상받았음을 알 수 있다.
  • 이를 통해 우리는 광주가 고려시절에 중도 즉 국토의 중간 방면의 큰 진이자 남로(南路)의 요충지로서 이 성이 함락당하면 나머지 지역도 위태롭게 될 만큼 중요한 곳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위 묘지명의 끝에 실린 명에 “남쪽 벼리를 광주라 하는데 요충에 자리잡았네. 황제(고려국왕)가 의지하고 중히 여기니 온 나라를 보호할 만하도다”라고 한 데에도 잘 나타나 있다.
    위 묘지명에 나타난 광주의 성은 일장산성 즉 남한산성으로 판단된다. 몽골의 2차 참략 대군이 남한산성을 수십 겹으로 포위해 수개월 동안 공격했지만 오히려 많이 사로잡히거나 살해당하는 피해를 보고 물러갔던 것이다. 위 묘지명에는 남한산성 전투의 승리는 오직 중앙에서 파견된 산성의 방어 책임자 이세화의 탁월한 지휘능력으로 인한 결과물로 묘사되었다. 물론 그의 뛰어난 능력과 공을 인정해야겠지만 이 전투 승리의 원동력은 어디까지나 성 안에서 생존을 위해 처절하게 싸운 광주민으로 보아야 한다. 어쨌든 고려사에는 누락된 전투상황이 이 묘지명에 의해 복원되어 광주를 명예롭게 만들었으니 광주민은 이규보와 이세화에게 감사해야 한다.
    제1차와 제2차 몽골 침략군을 광주산성(남한산성)에서 막아내 빛나는 승리를 거둔 광주민 속에는 당연히 오늘날 강동구 지역 사람들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외적이 침략해오면 당시 광주 관내의 사람들은 남한산성으로 피난가는 것이 당연하며 더구나 강동구 지역은 이 산성에 인접하였으니 더욱 그러하였다. 특히 최우 무신정권은 몽골의 2차 침략 직전에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모든 고려의 백성들은 반드시 산성이나 섬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그러하지 않은 경우 처벌까지 하였다. 남한산성을 함락하지 못한 몽골군은 남진하여 용인의 처인성으로 공격하였지만 총사령관 살리타이가 화살에 맞아 죽는 수모를 겪은 끝에 철수하였다. 그러니까 처인성의 화려한 승리에 빌미를 제공한 것은 바로 광주산성의 승리였다고 할 수 있다. 두 차례에 걸친 남한산성 전투의 승리는 강동민을 포함한 광주민의 명예로운 족적으로서 우리나라 전쟁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 광주는 공민왕이 홍건적의 2차 침략으로 개경이 위험해지자 복주(안동)로 피난할 때도 거쳐간 곳이었다. 공민왕은 10년(1361) 11월에 임진강을 넘고 양주의 영서역을 거쳐 광주 경내에 들어왔다. 왕은 사평원에서 개경 감무로부터 말 100여필을 받고 광주에 이르렀다.
    오늘날 강동구 지역을 통과해 광주의 치소가 있는 하남시 지역에 이르렀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하지만 향리와 백성은 모두 산성에 올라가고 주관만이 있었다 한다.
    왕을 맞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전부터의 전통에 따라 외적의 침입 우려가 있으면 광주산성에 들어가 생존하는 것이 보다 더 절실했던 것이다. 왕의 행렬은 광주 관내의 경안역과 이천현을 거쳐 음죽현, 충주를 경유해 안동에 도착해 전열을 정비하였다. 안정을 되찾은 고려군은 공민왕 11년 정월에 홍건적을 대파해 경성(개경)을 수복하고 압록강 너머로 몰아냈다. 개경으로 돌아온 공민왕은 12년에 그동안의 공로를 포상했는데 경성을 수복한 2등 공신에 광주목사 송양우가 포함되어 있다.
    이는 강동지역을 포함한 광주민들이 송양우의 지휘하에 개경수복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음을 시사해준다 하겠다.
  • 공민왕의 후원을 받아 중 신돈이 집권했을 때 신돈이 재상과 함께 광주 천왕사의 사리를 개경의 왕륜사에서 맞이한 적이 있었다. 이 천왕사가 광주 어디에 위치해 있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부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을 만큼 중요한 사찰이었음은 틀림없다. 당시는 불교시대였으므로 아마 강동구 지역 주민들도 많이 천왕사를 찾아 사리에 참배하였을 것이다.
    우왕 14년(1388)에 임견미·염흥방의 세력이 최영과 이성계의 군사력에 패배해 관련자 1,000여명이 살해당하는 정변이 일어났다. 이 때 살아남은 임견미·염흥방 당의 아내와 딸들은 먼 곳으로 유배되었는데 광주를 경유하였다. 한양의 풍양현 출신으로 광주의 몽촌 고탄성에 우거하고 있던 조운흘이 그 광경을 목격하였던 것이다. 몽촌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확정짓기 어렵지만 몽촌토성이 있는 송파구 올림픽 공원에서 강동구 둔촌동에 걸쳐 있었지 않았나 싶다. 어쨌든 살아남은 임견미·염흥방 당의 아내와 딸들은 배로 광나루를 건너 천호동 지역을 통과해 남쪽 멀리 유배갔던 것이다.

고려시대 강동 지역의 지배세력

  • 광주목에는 중앙에서 목사와 보좌관들이 파견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주목 ‘명환’조에는 고려 때 광주에 파견되어 정사를 잘한 지방관들이 몇 명 소개되어 있다. 목사 장선, 통판 홍자번, 참군 이혼, 사록 이진·안보·김부의, 그리고 몽골군의 침략에 대비해 파견되어 승리를 이끈 이세화가 그들이다. 이외에도 양광도광주등처절제사 겸 판광주목사 최운해, 목사 윤언이·최유청·설염임·송양우·백문보, 판관 이인정·김경용, 통판 김약온, 장서기 염신약, 서기 김류 등이 광주목에 부임하였다. 이들이 강동구 지역을 포함한 광주목을 국왕과 중앙정부를 대신해 다스렸던 것이다.
  • 이들 중 윤언이는 여진정벌의 영웅 윤관의 아들이었는데 묘청을 진압한 김부식과의 불화로 좌천된 것이었다. 최유청은 고려말의 영웅 최영의 먼 조상이었다. 홍자번은 충렬왕 때 수상에까지 오르는 인물이었다. 이진은 대학자 이제현의 부친이고, 이인정은 이진의 형이었다.
  • 그런데 고려시대에는 지방토착세력의 영향력이 커서 그들이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을 도와 실질적으로 자신의 고을을 지배하였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태조 왕건은 23년(940)에 지방제도를 개편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무렵에 토성(土姓)을 분정하였다. 토성은 호족 내지 호족의 후예로서 자신이 지배하는 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집단이었다. 그들은 향리가 되거나 중앙으로 진출하여 사족(양반)이 되었다. 고려는 조선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지방의 힘이 컸으며,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한 군현 즉 속군과 속현도 많았다. 고려의 향리는 조선의 그것과 달리 세력이 커서 자신의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토호 내지 유지였다. 광주목에도 목사가 파견되었지만 토성의 영향력이 컸던 것이니 광주의 토성은 이 일대를 지배한 성씨집단이 된다.
  • 고려시대를 어느 정도 반영한 조선 초기 『세종실록지리지』광주목에 따르면 토성(土姓)이 이(李), 안(安), 김(金)등 셋으로, 가속성(加屬姓)이 박(朴), 노(盧), 장(張)등 셋으로 망성(亡姓)은 윤(尹), 석(石), 한(韓), 지(池), 소(素)등 다섯으로 나타난다. 망성은 대개 망토성(亡土姓)을 가리킨다. 조선중기『신증동국여지승람』의 광주목 성씨조에는 이(李)·윤(尹)·석(石)·한(韓)·안(安)·김(金)·지(池)·소(素), 그리고 ‘속(屬)’으로 표시된 노(盧)·장(張)·박(朴)이 실려 있다. 이를 보면 고려시대에 광주를 지배한 토호는 토성내지 망성으로 표시된 이(李)·윤(尹)·석(石)·한(韓)·안(安)·김(金)·지(池)·소(素)등이라 할 수 있으며 특히 토성으로 표기된 이·안·김이 핵심 지배세력이었지 않나 싶다.
  • 고려시대에 광주 출신으로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단연 왕규였다. 그는 그의 전(傳)에 ‘광주인’이라고만 되어 있어 광주의 어느 지역 출신인지는 알 수가 없다. 위에서 언급한 『세종실록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광주목에서 왕씨는 확인 되지 않는다. 왕규는 원래부터 왕씨가 아니라 태조 왕건으로부터 사성(賜姓)을 받아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왕건을 사위로 둘만큼 광주의 대호족이었던 왕규는 토성인 이·안·김 등과 관련되었을 가능성과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후 가문이 몰락해 토성으로 취급되지 않았을 가능성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 왕규는 태조 왕건을 섬겨 대광(大匡)이 되었으며 왕건에게 딸을 둘씩이나 바쳤는데 하나는 제15비 광주원부인, 하나는 제16비 소광주원부인이었다. 특히 제16비는 광주원군이라는 왕자까지 낳았다. 나아가 왕규는 다른 딸 하나를 왕건의 아들인 제2대 혜종에게 들여보냈는데 후광주원부인이다. 왕규는 태조가 아파 죽음에 임박한 태조26년 5월에 염상, 박수문등과 함께 모시고 앉아 태조의 유언을 들을 정도로 태조의 신임을 받고 세력을 떨쳤댜. 그의 사위인 무가 제2대 혜종으로 즉위하자 그의 세력은 더욱 떨치게 된다.
    그런데 『고려사』권 127 반역 1 왕규전에 따르면, 태조가 세상을 뜨고 혜종이 왕위에 올랐는데 왕규가 왕의 배다른 동생인 요(정종)와 소(광종)가 반역하려 한다고 참소하고 해치려 하였다. 혜종이 무고임을 알고 그 동생들을 더욱 잘 대해 주었으며 맏딸을 소와 혼인시켜 그들의 세력을 강하게 만들었다. 또한 왕규는 외손인 광주원군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어느날 밤에 부하를 왕의 침소로 잠입시켜 잠든 왕을 시해하려 하다가 왕이 깨어 반격하는 바람에 실패하였지만 왕은 추궁하지 않았다. 또 어느 날 밤에 왕규가 부하들을 거느리고 궁에 들어와 벽에 구멍을 뚫고 침소에 침입하였다. 왕은 점술가 최지몽의 예언에 따라 이미 다른 곳으로 몰래 피신해 있던 터라 무사하였지만 역시 왕규의 죄를 묻지 않았다.
  • 그리고 왕규는 혜종의 후원자였던 대광 박술희를 평소에 미워하던 차에 혜종이 세상을 뜨자 정종의 명이라 꾸며 살해하였다. 혜종의 병이 깊어지자 정종이 왕규가 다른 뜻이 있음을 알고 비밀히 서경(평양)의 대광 왕식렴(태조의 사촌동생)과 연결하여 대응하였으며, 왕규가 난을 일으키려 하자 왕식렴이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지키니 왕규가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이에 왕규를 강화도의 갑곶으로 유배하고 사람을 뒤따라 보내 참수하였으며 그 당여 300여인을 주살하였다 한다. 이러한 전개과정이 이른바 ‘왕규의 난’이며 그래서 왕규는 불명예스럽게도 반역전에 실려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기록을 세밀히 음미해보면 왕규가 사위인 혜종을 몰아내고 외손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난을 일으켰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별로 없다. 오히려 막강한 호족인 충주 유씨를 외가로 두었으며, 태조의 사촌동생으로 서경의 군사권을 장악한 왕식렴과 친밀한 요와 소 형제가 정변을 일으켰다는 인상을 받는다. 요는 혜종의 뒤를 이어 정종이 되며, 소는 정종의 뒤를 이어 광종이 된다. 후삼국과 고려초기에 정국을 호령한 광주의 대호족 왕규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하겠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광주목 인물조에는 고려시대 인물이 없는데 왕규 정도면 실리고도 남을 인물이다. 왕규의 외손이자 태조의 아들인 광주원군은 가엾게도 왕규가 몰락하면서 어떻게 생을 마쳤는지 모른다고 한다. 왕규의 몰락은 광주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8목의 하나로서 지방행정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전략과 교통의 요충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행적을 나타낸 광주 출신 인물이 없다는 점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광주는 반역의 땅으로 낙인찍혀 이곳 출신 인물들은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소외당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광주의 토성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지역을 지배하였으며 고려 말로 가면서 사회변동의 폭이 넓어지자 중앙으로의 진출을 꾀하게 된다.
  • 광주의 토성으로 이, 안, 김이 있었는데 맨 앞에 실린 이씨가 주목된다. 광주 이씨를 둔촌 이집과 석탄 이양중에 유의하여 살펴보자.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주목 인물조 ‘본조(조선)’항에는 이집, 그의 세 아들 이지직, 이지강, 이지유, 이지직의 세 아들 이장손, 이인손(우의정 역임), 이예손, 이인손의 아들 이극배(영의정 역임)등 광주 이씨들이 다수 실려 있다. 이들은 모두 과거에 급제한 수재였으니 참으로 보기 드문 현상이며 교육열이 대단한 집안이라 하겠다. 이지직과 그 형제들은 고려 말에 급제하고, 이지직의 아들들은 조선건국 초에 급제하였다. 위 인물조에 따르면, 이집은 광주의 리 즉 향리로 고려 공민왕 때 급제하였다. 성격이 강직하여 신돈에게 아부하지 않다가 해를 입히려 하자 부친을 업고 경상도 영천에 도망해 숨었다가 신돈이 죽음을 당하자 경사(개경)로 돌아왔다. 본조(조선)에 벼슬하여 관직이 전교판사에 이르렀다. 학문이 고매하여 이색, 정몽주, 이숭인과 교유하였는데 모두 존경하고 중히 여겼다 한다.
  •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광주목의 말미에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변오(辯誤)조가 설정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이집이 ‘고려’항에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이당이 본주 즉 광주의 향리였는데 다섯 아들이 모두 등과하였다. 이집은 그 세 번 째 아들로 처음 이름은 이원령이었다. 고려 충목왕 때 급제한 그는 문장과 지절(志節)로 이름을 떨쳤으며, 이색, 정몽주, 이숭인 등과 서로 어울려 ‘ 경우(敬友)’가 되었다.
    일찍이 신돈의 뜻을 거슬러 살해하려 하자 부친 이당을 업고 낮엔 숨고 밤엔 가고 해서 영천 최윤도의 집에 의탁하였다. 신돈이 죽음을 당하자 돌아와 이름을 ‘집(集)’, 자(字)를 호연(浩然), 호를 둔촌(遁村)이라 하였다. 이로부터 은거하려는 마음을 품었다. 봉순대부 판전교시사가 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 여주의 천녕현에 퇴거하여 궁경(躬耕)독서하였다. 공양왕(사실은 우왕) 정묘년에 졸하니 정몽주, 이숭인 등이 모두 시를 지어 곡하였다. 아조(조선)가 개창할 때 그 사적 전말이 여러 문집에 실려 있었는데도 역사를 편찬함에 미쳐 임사홍 부자가 이극감(이집의 증손)형제를 심히 미워하여 이집이 아조에 들어와 벼슬하였다고 무고하였기 때문에 드디어 본조 인물아래에 잘못 기록되었다. 선조 때 경연관 홍적이 고치기를 청하니 인출(印出)할 때를 기다리라 명하였다. 상(上) 3년에 이 책을 간행함에 있어 공의 8대손 영의정 이덕형이 상서를 올려 유교(遺敎)를 준수하여 바로잡기를 청하였다. 상이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개찬하여 거짓을 없애고 사실을 기재하도록 하니 출처와 대절(大節)이 명백하여 유감없이 되었다 한다.
  • 그러니까 이집은 고려말의 인물로 정묘년(우왕13년:1387년)에 세상을 떴으므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광주목 인물조의 본조(本朝)항에 실린 것은 잘못이며 마땅히 ‘고려’항을 마련하여 실었어야 옳다는 이야기이다. 정몽주와 이숭인의 이집의 죽음을 곡하는 시가 이집의 문집인 『둔촌잡영』부록에 실려 있으니 이집이 조선에 들어와 벼슬하기는 귀신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조선 중기에는 절의를 중시했는데 이집이 조선 건국 후에 벼슬한 것으로 되면 절의를 저버린 것이 되고 이는 그 후손을 깎아 내리는 구실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효종 3년(1652)에 11대손 이휴징이 쓴 이집 묘갈문이 『둔촌잡영』보편에 실려 있다. 여기에는 이집이 광주 이씨의 시조라 표현되었으며 이집의 위로는 부친 이당만 언급되었다. 이당은 본래 주리 즉 광주의 향리로서 예비시인 사마시에 올랐으며, 그의 다섯 아들이 모두 등제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이집이 두 번째 아들이라 되어 있어 세 번째 아들이라 되어 있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변오’조와 다르다.
    이집의 묘갈문에는 부친까지만 언급되었지만 『씨족원류』의 광주 이씨 항에는 그 조상에 대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향임 이자성 → 향임 이군린(혹 이방린) → 향임 이용수 (혹 이방의) → 영동정 이한희로 이어진다. 이에 따르면 이집의 집안은 전형적인 향리 집안이었다. 이집의 묘갈문에서 부친 이당까지만 밝힌 것은 향리를 천시하는 조선 후기의 인식이 반영되었지 않나 싶다. 대대로 향리를 역임한 사실이 자세히 실려 있는 점으로 보아 『씨족원류』의 광주 이씨편의 내용은 대체로 신빙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향리는 세습되는 것이므로 이당과 이집 부자가 향리였다는 것만으로도 향리 집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향리는 조선시대의 그것과는 달리 호족의 후예로서 지방을 지배하는 명예로운 존재였다. 광주 이씨 집안은 대대로 향리직을 세습하여 광주를 지배하다 원 간섭기에 해당하는 이당의 대 무렵부터 중앙으로 서서히 진출하기 시작하였으며 고려말 ~ 조선초로 가면서 그러한 경향이 더욱 강해져 조선중기에 이르러 명문세족으로 자리잡았다고 하겠다. 향리 집안이 출세하는 데는과거 급제 외에 다른 길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이 집안은 자제들을 치열하게 교육시켜 급제자들을 대를 이어 무더기로 배출함으로써 명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변오’조나 이집 묘갈문에서 이집을 포함한 다섯 명의 형제들이 모두 등과(등제)했다고 되어 있다. 아들 셋이 과거의 본고시에 합격하면 대단한 일로 간주되어 포상을 하고 야단법석을 떨곤 하였으니 다섯 아들이 그랬다면 기록에 남아야 하지 않을까. 이집은 분명히 본고시에 급제하였지만 나머지 형제들도 모두 본고시에 급제한 것일까. 여기의 ‘등과(등제)’라는 표현은 혹시 과거의 예비고시 합격까지 포함해서 사용된 용어가 아닐까.
  • 정리하자면 광주의 향리 이당의 아들로서 역시 향리였던 이원령은 충목왕 3년에 과거의 예비시에 합격하고 공민왕 4년에 본고시에 합격해 관직생활을 하였다. 신돈에 거슬려 경상도 영천 친구집에 부친과 함께 살았다. 신돈 몰락 후에 돌아와 얼마동안 벼슬하여 3품인 판전교시까지 올랐다. 하지만 은거할 마음을 품어 이름을 이집이라 고치고, 자를 호연(浩然), 호를 둔촌(遁村)이라고 한 터라 곧 여주의 천녕현에 퇴거하였다. 목은 이색이 쓴 『둔촌기』에 의하면, 이원령은 맹자 ‘집의(集義)’의 집을 따서 이름을 삼고 맹자의 호연지기를 취하여 자(字)를 삼았다. 고려말의 성리학자들은 사서에 관심을 많이 가졌는데 이원령 즉 이집은 그 중에서도 맹자에 심취했던 것이다. 또한 둔촌기에 따르면 황야에 달아나 신돈 당의 화를 피하여 살아남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던 요인은 전적으로 ‘둔(遁)’에 기인한 것이어서 자신이 거처하는 곳을 ‘둔촌’이라 했다고 이집이 이색에게 밝혔다.
    이집의 본관이자 고향은 광주였으니 여기서 성장하고 조상 대대로 세습해온 향리직을 계승하였다. 급제하고 관직에 오르면서 고향을 떠났지만 여전히 친척들은 고향에 있었다. 그의 퇴거지는 여주 천녕현이었지만 광주에 들르거나 잠시 머무르곤 하였다. 『둔촌잡영』에 실린 “광주에서 동년 최 사관(史官)에 차운(次韻)하다‘는 시가 그것을 말해준다. 오늘날의 강동구 둔촌동이라는 지명도 둔촌 이집이 이 지역에 은거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생겨났다 하며, 둔촌동 뒤의 ’굴바위‘와 ’둔굴‘은 그가 은거했던 곳이라 한다. 또한 그는 뒤에 언급하듯이 암사동의 구암서원에 모셔졌다. 이로 보면 이집은 강동구의 저명한 인물인 셈이다. 이집의 광주 이씨 집안은 광주목을 실질적으로 지배한 향리 내지 토호로서 강동구 지역과도 많은 연관을 맺었으리라 여겨진다.
  • 위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이당의 8촌인 이전사의 손자로 이양중이라는 인물이 있다. 고려를 위해 절개를 지킨 인물들이 『기우집』권 2 두문동 72현록에 실려 있는데, 이양중이 이당의 형 이한의 증손녀 사위인 서견(이천인)과 함께 포함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이양중은 호가 ‘석탄’, 관향이 광주, 관직이 형판으로 조선건국 초 광주에 퇴거하였으며 유배당하고도 굽히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광주부읍지』인물조 고려 항에도 그가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그는 이집과 동종(同宗)으로 고려말에 관직이 형조참의였는데 조선건국 때 절개를 지켜 남한산 아래에 퇴거하여 부름에 응하지 않아 유배당해도 굽히지 않았다. 태종이 즉위하여 잠저 때의 친구라 하여 우대하고 한성부윤에 제수했지만 받지 않자 그 장자인 이우생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태종이 이양중을 방문하였다가 만나지 못하고 유숙하고 되돌아가 그곳을 ‘왕숙탄(王宿灘)’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양중이 광주의 어느 지역 출신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강동구 암사동 지역에 조선 숙종 때 만들어진 구암서원에 이집과 더불어 모셔진 것으로 보면 강동구 지역과 관계가 있었던 것 같다.
  • 다음으로는 광주 토성의 두 번째로 올라 있는 안씨가 눈길을 끈다. 1871년경에 편찬된 『광주부읍지』의 인물조에는 고려 때 인물로 안방걸, 안기, 안국주, 안강이, 조선 때 인물로 안성이 실려 있다. 읍지에 따르면, 안방걸은 광주 사람이 난을 일으켜 그 주(主)를 살해하자 토평하였으며, 또한 평양에서 승리를 거두자 고려 태조가 그 공을 가상히 여겨 광릉군에 봉하고 광주를 관향으로 하사하여 안씨의 시조가 되었다. 안방걸의 후손인 안기는 충선왕을 섬기고 공양왕 때 이부상서 판전농시사에 이르렀지만 고려말에 정치가 문란해지자 병을 칭탁하고 함안에 퇴거했는데 82세에 세상을 떴다. 안기의 아들인 안국주는 중랑장에 이르렀지만 정몽주가 피살되자 함안으로 돌아갔으며 두 번 불러도 응하지 않고 89세로 세상을 떴다. 안국주의 아들 안강은 아버지가 물러나 벼슬하지 않자 역시 은거하였다. 안성은 과거에 급제해 관직이 개성유수에 이르고 후에 ‘지간(志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비교적 객관적인 조종운의 『씨족원류』에는 광주 안씨의 계보가 안방걸(대장군) → 후손 안수(安綏 문하시중)→ 안지(판군기시사) → 안수(安壽 판도평의사사) → 안해(판전농시사) → 안기(판전농시사) → 안성(개성유후, 사간공)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일본(一本)에는 안수가 있으나 안기가 없고, 일본((一本)에는 안수가 없으나 안기가 있다고 세주를 달았다. 안수(安綏)가 수상인 문하시중을 안수(安壽)가 재상회의 도평의사사의 판사를 지냈다는 점은 추증직이 아니라면 신빙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 정도의 재상직을 지낸 인물은 보통 정사에서 확인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중에 안성은 조선중기의 『신증동국여지승람』권 6 광주목 인물조 본조(조선)편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개성부 유후(留後)에 이르렀고 후에 시호를 사간(思簡)이라 하였다”고 되어 있어 신상명세가 객관적으로 확인되는 인물이다. 『기우집』권2에는 조선왕조 개창에 반대해 절개를 지킨 두문동(杜門洞) 72현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 안성도 포함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안성은 관직이 직제학이었는데 태조 이성계가 평양백에 임명하였지만 받지 않았다고 한다.
  • 『동문선』권16 칠언율시에는 안지상이 광주 촌장(村莊)에서 급제 동년으로 장원인 강화 만호 하을지에게 헌정하는 시가 실려 있다. 하을지는 충목왕 즉위년 11월에 박충좌와 이천 밑에서 장원급제하였다. 그런데 공민왕 22년(1373) 반남 박씨 준호구(准戶口)에 따르면 박수의 사위이자 박상충의 매부로 정산군 지사인 안길상이 실려있다. 또한 안길상은 본관이 광주이며 갑신년(충목왕 즉위년, 1344)에 을과 2등으로 급제하였다고 되어 있다. 박수의 아들이자 이곡(이색의 부친)의 사위인 박상충은 고려말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학자이다. 박상충의 매부가 되는 이 안길상은 바로 안지상과 동일인으로 판단된다. 그러니까 광주 출신의 안지상(안길상)은 충목왕 즉위년에 좌주(座主 : 고시관)인 박충좌와 이천 밑에서 2등 즉 아원(亞元)이라는 빼어난 성적으로 급제하였던 것이다.
    안길상(安吉常)은 또한 안길상(安吉祥)과 동일인으로 판단된다. 안길상은 충목왕 때 개혁을 담당한 정치도감의 녹사(실무진)으로 활동한다. 안렴사가 정동행성의 이문(理問) 윤계종이 이천 향리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보고를 올렸다. 그런데 안길상은 윤계종의 은혜를 입은 적이 있어 은폐하였다가 정치도감의 판사인 왕후와 김영돈에게 뺨을 얻어맞고 쫓겨났다. 충정왕의 공부를 돕는 시학으로 활동했던 전교승(典校丞) 안길상은, 숙부 공민왕에 의해 쫓겨나 강화도로 향하는 충정왕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가 하직인사를 올렸다. 이러한 사례들은 그가 은혜를 저버리지 않고 의리를 중시한 인물이었음을 말해준다.
  • 이후 안지상(안길상)은 고향 광주로 돌아와 은거한 것으로 보이는데 바로 이 시절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하을지에게 보낸 시에 그의 불우한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하을지는 공민왕 22년 7월에 강화만호로서 왜구를 막지 못하여 처벌받았으니 광주 은거지에서 안지상이 하을지에게 시를 보낸 때는 공민왕 22년 무렵이 된다.
    이로 보아 안지상은 공민왕 치세의 거의 내내 관직에서 소외되어 있다가 공민왕 말년이 되어서야 지방관에 부임하였다고 여겨진다. 그는 이처럼 오랫동안 은거함으로서 자신이 모셨던 충정왕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고 볼 수 있다. 안길상은 우왕 3년 6월에 정3품인 판전객시사로서 왜구를 근절시키기를 요구하는 임무를 띠고 일본에 파견되었다. 하지만 그는 우왕 6년 11월에 병으로 그만 머나먼 타국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처럼 충목왕때 아원으로 급제하여 우왕 때까지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낸 안지상(안길상)은 광주가 본관이고 여기에 촌장을 갖고 있었다. 안지상은 처남인 박상충의 아들 박은이 강동 지역에 묻힌 것으로 보아 출신지가 광주 중에서도 강동 지역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안지상은 그 가족관계에 대해 부친이 안생이라는 점 정도밖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러한 정황들로 보아 앞에서 소개한 안성 집안과 친척관계였으리라 여겨진다. 광주의 토성 안씨는 광주 사람 왕규의 몰락으로 불이익을 받다가 안지상, 안성 등의 예처럼 고려말에 가서야 서서히 중앙으로 진출하지 않았나 싶다.
  • 요컨대 고려시대에 광주 출신 인물들은 건국초에 이곳 출신의 왕규가 권력투쟁에서 패배해 몰락하면서 중앙의 정치무대에서 소외되었다. 물론 이씨, 안씨, 김씨 등이 호족의 후예인 토성으로서 광주를 실질적으로 지배하였으며, 특히 이씨는 고려말 이집 때까지도 대대로 호장을 세습하였다. 안지상·안성의 안씨와 이집·이양중의 이씨 집안은 원 간섭기 무렵부터 서서히 중앙으로 진출하였으며 특히 이집 계열은 고려말~조선초에 급제자를 대거 배출해 명문으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 한편 1871년 경에 편찬된 『광주부읍지』에 따르면 오사충, 박은, 유창의 묘가 광주의 구천면 즉 오늘날의 강동구 지역에 있다. 오사충은 정도전과 같은 계열을 급진파로서 이색와 정몽주를 비판하는 데 앞장 선 인물이었다. 그의 선대는 경상도 영일에 살다가 평안도 영원진으로 옮겼다. 그는 공민왕 4년 2월 이공수와 안보 밑에서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이집과 동년이었는데, 그가 광주 지역에 묻힌 연유가 이와 관계가 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다. 박은은 전라도 나주의 반남(潘南)사람 박상충의 아들로서 창왕 즉위년에 정도전과 권근 밑에서 급제하고 조선걱눅 후에 활약을 많이 한 인물이다. 박은이 강동 지역에 묻힌 것은 부친 박상충의 매부인 광주 안길상의 연고지와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 유창은 공민왕 20년에 이색과 전록생 밑에서 국왕의 친시에 급제한 인물이다. 그는 위에서 살펴 본 바에 따르면 바로 이집의 사위였다. 이집과 절친한 이색이 그의 문생(자신이 주관한 과거의 급제자)인 유창을 이집에게 사윗감으로 추천했지 않았나 싶다. 유창은 원래 강릉 사람이지만 처가의 마을에 뼈를 묻은 것이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 오늘날의 강동구 지역은 조선시대에 경기도(京畿道) 광주군(廣州郡) 구천면(龜川面)에 속하여 있었다. 구천면이라는 지명은 조선 예종 원년(1469)에 어세겸(魚世謙)이 익대공신(翊戴功臣)이 되어 고덕동을 중심으로 한 강동구 일대를 사패지로 받으면서 그 땅을 아버지인 어효첨(魚孝瞻)의 아호인 구천(龜川)으로 명명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 구천면은 1907년에 구천면(九川面)으로 한자명이 바뀌었으며, 강동구 지역은 1962년까지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으로 내려왔다.
  • 원래 광주는 땅이 넓은 고을이라는 데서 한자로 ‘넓을 광(廣)’을 썼다고 한다. 고려 성종(成宗) 2년(938)에 처음으로 12주에 목(牧)을 두었을 때 그 중 하나로 이곳은 광주목(廣州牧)이 되었고, 이후 300년 동안 거의 변함없이 광주목은 존속하였다.
  • 조선이 개국한 후, 세조(世祖) 때 이곳 광주에 진을 설치하여 광주목 소속 진영으로 목(牧)이 하나로 여주(驪州)가 있었고, 도호부(都護俯)도 하나로서 이천(利天)이 있었다. 또한 군(郡)은 하나로 양근(陽根)이 있었고, 현(縣)으로는 음죽(陰竹)·과천(果川)등 5개가 있었다.
  • 연산군(燕山君) 11년(1505)에 이 고을 사람으로 난언(亂言)을 한 자가 있었으므로 본주(本州)를 혁파했다가 중종(中宗) 초에 복구했었고, 동왕 6년(1511)에 이 고을이 조폐(凋弊)했으므로 판관(判官)까지 혁파하였다. 그 뒤 50여 년이 지난 뒤 명종(明宗) 14년(1559)에 방어사(防禦使)를 겸하였고, 선조(宣祖)6년(1573)에 토포사(討捕使)를 겸하였고, 선조10년(1577)에 부로 승격되어 수어사(守禦使)를 겸하도록 하였다.
  • 인조(仁祖) 원년(1623)에는 유수제(留守制)를 실시하였으며, 인조 4년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쌓고 주치(州治)를 성내로 옮겼고, 동왕 8년(1630)에는 다시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되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비롯한 국난을 만날 때마다 남한산성은 국왕의 피신처가 되기도 하였다. 영조(英祖) 26년(1750) 유수로 승격되어 수어사를 겸했다가 동왕 35년에 다시 부윤으로 되었다.
  • 영조 36년에 편찬된 『여지도서(餘地圖書)』에 의하면 이 고을은 광주부절제사(廣州俯節制使) 진관(鎭管)으로, 소속 읍으로는 여주·이천·양근·지평(砥平)·음죽·양지(陽智)·죽산(竹山)·과천이 있었고, 토포소 속읍으로는 양주(楊州)·영평(永平)·포천(抱川)·가평(伽平)·양근·과천·금천이 있었으며, 영장 소속 읍으로는 이천·용인(龍仁)이 있었다. 당시 소속 면으로는 경안도(慶安道) 찰방역(察訪驛)을 두었던 경안면을 비롯하여 오포면·도척면·실촌면·초월면·퇴촌면·초부면·동부면·서부면·구천면·중대면·세촌면·돌마면·낙생면·대왕면·언주면·왕륜면·일용면·월곡면·북방면·송동면·성곶면 등 23개 면이 있었다.
  • 그 뒤 조선시대 말기인 고종(高宗) 32년(1895)에 월곡면·북방면·성곶면의 3면은 안산군에 넘겨주고, 광무(光武) 10년(1906)10월 1일 군이 되어 한성부(漢城府) 관할이 되었다. 1910년 중부면을 설치하고, 군청을 중부면 산성리에 두었으며, 1911년에는 대왕면을 설치하였다. 이제 현재의 강동구에 해당하는 광주부의 구천면에 대해 알아보자. 조선초기 기록인『세종실록』지리지나『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광주목 전체를 포괄하여 항목별로 서술하고 있어 구천면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안다.
    그런데, 영조 35년(1759)의 호구장적을 보면 광주부의 행정구역은 23개면 113개리로 구획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구천면에는 일동·고다지동·명일원리·암사동·곡교리·기리동·둔촌동·성내동 등 8개리가 있었다.
    다음 30년 후인 정조13년(1789)에 간행된『호구총수』에 보면 광주부는 2개면이 수원부에 편입되어 21개면으로 축소되었으나, 구천면은 곡교동·성내동·기리동·둔촌동·일동내·고다지동·암사동·명일원리 등 8개 마을로 되어 있어 30년전과 비교하여 거의 변화가 없었음을 볼 수 있다. 이후 조선후기 광주는 계속해서 행정구역 상의 변화가 있었으나, 구천면 지역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그러다가 1914년 전국 행정구역이 통폐합될 때 광주군은 16개면 183개리로 개편 관할하게 되는데, 이때 구천면에는 암사리·고덕리·상일리·하일리·명일리·길리·둔촌리·풍납리·성내리·곡교리 등 10개리로 구획되었다.
  • 다음 조선시대 광주군과 구천면 지역의 인구에 대해 살펴보자.『세종실록지리지』작성시 광주군의 인구는 호(互)1,436 구(口) 3,110이다. 이 숫자는 정군(正軍)과 봉족(奉足)을 합한 수를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그 이후에 영조35년(1759)의 기묘장적의 통계를 보면 호 11,713 구 54,709(남:23,398 여:31,311)이었다. 그 후 정조(正祖) 13년(1789) 기유장적 통계에 의하면 광주는 호 10,568 구 50,508(남:24,402 여:26,106)으로 영조 35년 보다 감소되고 있다. 또한 헌종(憲宗) 2년(1836) 병신장적에는 호 10,492 구 50,045(남:22,751 여:27,294)였었다.

강동구와 도자기

  • 조선시대에 있어서 어기(御器) 공급을 위한 관영 사기제조장, 즉 사옹원(司饔院)의 사기제조소를 분원(分院)이라 했는데, 이 분원은 경기도 광주군에 설치했다가 분주원으로 개칭되었다. 그런데, 사옹원의 사기제조소, 곧 분원이 처음 설치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흔희 분원사기라 불리는 도자기는 광주분원에서 만든 것으로, 그 대표적인 것은 도자기공예 면에서 청화백자가 손꼽힌다. 이 청화백자는 조선초기부터 제조되기 시작하였으며, 후기에 들어오면 희청을 풍부히 사용할 수 있게 되어 개량으로 생산되고, 그 전에 비해 보편화되기에 이르렀다.
  • 청화는 전대의 것과는 달리 색깔이 검푸르고 조야하여 칙칙한 느낌을 주는 경우도 있다. 또 기형도 둔탁해지지만 그 대신 순박하고 서민적인 취향이 증대되는 경향을 보였다. 조선후기의 도자기 제조의 본거지였던 분원은 고종 19년(1882)부터 관영에서 민영으로 바뀌게 되었고, 머지않아 그 기능을 읽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조선시대의 도자기는 광주자기가 주류를 이룬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조선시대에 관의 직속으로 번조되었던 관요들 중 그 제작 소재지가 분명희 파악될 수 있는 것은 광주가마 뿐이다. 광주분원이 언제부터 설치되었는지 그 절대연대를 아 수 없으나, 대체로 고려말 조선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정설로 일반화된 것 같다. 광주분원 설치에 대하여 조선 초 조준이 사옹원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고,『세종실록』지리지를 비롯하여 성현의『용재총화』에서 정교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러한 확신을 더욱 뒷받침해 주고 있다. 15세기경에 이미 광주지방으로 옮겨왔던 조선의 관영사기 제조장이 언제부터 사옹원 분원이란 명칭으로 불렸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적어도 인조 초년 즉 17세기 초엽에는 이미 분원으로 지칭되고 있었다. 생각건대, 관영사기제조장은 그 설치 당초부터 사옹원에서 관장하였으며, 제조장의 규모가 점차 커지고 궁중에서의 사기 수요량이 증가됨에 따라 제조작업 자체가 중시됨으로써 직접 현지에서 제조작업을 관할하는 관청이 별설(別設)되었고 이를 사옹원 분원이라 부르게 된 것 같다.

강동구와 실학서학

  • 강동구와 실학서학 이미지 조선후기 광주지역은 실학과 서학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지역이었다. 그동안 조선을 지배하던 주자학에 대신하여 현실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역사·지리·정치·경제 등을 연구하는 실학운동이 일어나고, 이것은 마침내 천주교를 신앙으로 믿는 서학운동으로 까지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주로 한강유역, 특히 광주지방에 살던 남인학자들 사이에서 일어났는데,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현재 강동구 지역도 광주지역에서 발원하였던 실학과 서학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 우리나라 실학운동의 선구자는 지봉 이수광이었다. 그는 동서고금의 348종의 도서를 읽고, 그것을 분야별로 발췌하여 1614년에 20권의『지봉유설』이라는 백과서를 편찬했는데, 그 속에 마테오리치가 지은『만국여도』·『천주실의』등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즉,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과, 중국 이외에 서양에 여러나라가 있고 그들 나라에서 천주교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으로서 그 이전의 세계관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것이었다.
  • 이수광이 일으킨 실학운동 가운데, 특히 천주교 연구운동은 그 후 100여 년이 지나 한강유역인 광주부 안산 점성촌에 숨어살던 남인학자 이익과 그 문하생 가운데서 크게 일어나게 되었다. 즉, 이들도 대부분이 한강유역에 살고 있던 남인학자들이었는데, 그 중심인물은 양근에 살던 권철신, 정약전 등은 정조 원년(1777) 겨울 광주와 여주의 접경지대인 앵자산 주어사에서 김원성, 권상혁(권일신의 아들), 이총억과 더불어 교리연구회를 열고, 권철신의 지도하에 수도생활을 일으켰는데. 이 소식을 듣고 권철신의 매부이던 이벽도 이 모임에 참가했다. 광주의 이러한 모임이 한국천주교회사, 나아가서 한국의 신사상의 발원지가 되었던 것이다.
  • 권철신 등이 교리연구회를 열었는데, 그 동안에 천주교의 교리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점이 생기게 되었다. 즉 천주교의 교리와 재래습속과의 불일치, 천주교 사회와 그 사회와의 모순 등이었다. 이러한 의문점을 해명하기 위하여 교리 연구회원을 북경에 보내기로 하였는데, 여기에 뽑힌 사람이 27세의 청년 이승훈이었다.
  • 정약전의 매부이자 교리연구회원이던 이승훈이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가서 선비로서 처음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서 참된 신자가 된 이승훈은 수십권의 천주교 서적과 성서, 성물 등을 갖고 돌아왔다. 그는 귀국한 즉시 그것들을 이벽에게 넘겨주었는데, 이벽은 곧 은밀한 곳에서 그 책들을 연구하여 천주교의 진리와 미신에 대한 반증과 칠성사의 설명과 복음의 해설과 매월의 성인전 및 기도문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전도사업에 나섰다. 그러므로 이승훈은 이벽에게‘요한세자’라는 교명으로 대세를 주고, 두 사람은 양근으로 가서 권일신 형제에게‘프랑시스코 사비에르’라는 교명으로 대세를 주었는데, 이들이 바로 조선교회 창설의 주동인물이었다.
  • 이리하여 정약전 삼형제를 비롯한 양반계급으로부터 학식이 높은 중국어역관 김범우, 최인길 등과 같은 중인계급과 충청도 내포지방의 상민 이서원과 전라도 전주의 양반 유항검 등도 입교시켜 이미 수십 명의 영세신자를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승훈, 정약전 삼형제, 권일신 부자, 이벽 등은 정조 8년(1784)서울 남부 명예동에 있던 역관 김범우의 집 대청에 모여 이벽을 지도자(가신부)로 삼아, 주일행사를 거행함으로써 조선교회를 창설하게 된 것이다. 이때 이벽은 머리에 청건을 덮어 써서 어깨까지 내리고, 벽을 등지고 앉아서 설법하여, 그 앞에 이승훈 등은 모두 제자로 자처하니 그야말로 외국의 힘이 아닌 한민족 자신의 힘으로 새사상을 정착시킨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모든 노력에도 광주출신 이벽의 노력이 매우 컸다.

한강변(漢江邊) 상업의 발달과 강동구

  • 한강유역은 고대로부터 그 중요성이 인식되어 왔으며, 특히 삼국시대에는 3국간의 쟁패대상이 되었던 요지였다. 그 후 이곳은 조선왕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함으로써 더욱 주목을 받게 되었고, 한양이 정치·경제 등 모든 면에 있어 중심지 역할을 하는데 큰 몫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 한강에는 교량설비가 제대로 이루어져 있지 않아서 진(津)·도(渡)·제(濟) 등 나루터가 발달하였다. 경강(硬鋼)에 설치되었던 나루터는 대략 광진(廣津), 즉 광나루에서 시작하여 양화도를 지나는 한강의 하류 쪽에 위치해있었다. 광진·삼전도·서빙고·흑석진·동작진·한강도·노량도·두모포·마포·서강·양화도·사천·조강도 등이 그 중요한 곳이었다.
  • 한강은 이처럼 교통상의 중요성을 지니고 진도(津渡)로서의 통행도 전담해 주었지만, 또 한편 경제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것은 세곡(稅穀)을 비롯하여 서울 도민들의 생활필수품을 운반하는 것이었다. 즉, 전국의 세곡이 조운(漕運)을 통해 집결되는 곳이 바로 한강이었고, 서울에 거주하는 지주층이 지방에 소유하고 있는 농장에서 수취도니 소작료 역시 선박을 통해 이곳으로 운반되었다. 서울 도임들의 일상생활용품, 예를 들어 미곡(米穀)·시목(柴木)·어염(魚鹽)·광물건축용 목재 등도 또한 이곳을 통해서 공급되었던 것이다.
  • 이처럼 일찍부터 물화(物貨)의 집산(集散)이 활발했으므로 경강변에는 이미 조선전기부터 많은 상인들이 몰려들어 여러 형태와 규모를 지닌 상업을 영위해 갔던 것이니, 특히 이들은 사선을 이용하여 세곡을 운반하는 운수업과 선상업 등에 종사하면서 자본을 축척하여 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경강변에는 일직부터 마포·서강·용산·두모포·뚝섬 등지를 중심으로 하나의 중요한 경제권이 형성되어 있었다.
  • 광나루[廣津]
  • 광나루는 광주부 북쪽, 20리 광장동 광진교 부근에 있었다. 광나루는 강동구 지역을 거쳐 광주와 연결되고 뱃길로 멀리 충주를 거쳐 동래로, 또는 원주를 지나 동해안으로 향하는 요충의 도선장이었다. 또한 광나루는 강원도 쪽에서 내려온 뗏목들은 여기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마포나루터로 옮겨지곤 하여, 목재의 집산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광나루에서는 1920년대에 발동선으로 나룻배를 끌어줌으로써 화물차나 버스도 건네주었고, 1930년대를 전후해서는 교통량이 격중해 강을 건너는 자동차·우마차·손수레 등이 하루에도 수백대에 달하게 되었다. 1936년 경기도에서 이 지점에 광진교를 설치하였고, 이에 따라 광나루는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 두모포[豆毛捕]·뚝섬
  • 두모포는 원래 동빙고(凍氷庫)가 있었으나, 연산군(燕山君) 때에 서빙고 동쪽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빙고가 옮겨가기 전부터 이곳은 포구였으며, 조선중기 이후는 뚝섬과 더불어 한강 상류지방에서 오는 각종 물자, 즉 고추·마늘·서류 등 전곡과 목재·시탄(柴炭)의 집산지가 되는데, 특히 시탄의 집산지로 유명하였다. 두모포의 동부인 입석포 동편에는 중랑천·청계천이 한강과 합류하여 항상 수량이 풍부했을 뿐아니라, 옛날에는 두모포 앞에 저자도라는 큰 모래섬이 있어 방풍도 되고 유속도 조절해주어 두모포는 포구로서의 좋은 조건을 갖추었으니, 한강상류를 왕래하는 강상들의 본거지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뚝섬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때 서울에서 충북지방과 경상도로 가는 길에는
    ① 한강교를 거쳐 판교→용인→충주로 가는길과
    ② 살곶이다리를 건너 뚝섬→송파→판교→용인→충주로 가는 두 길이 있었다.
  • 그러므로 나루로서의 비중으로 볼 때, 뚝섬은 두모포보다 우위에 있었고, 강상(江商)들의 근거지가 될만한 충분한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뚝섬나루는 그 배후에 살곶이들이라는 넓은 저지가 있었을 뿐, 기댈 수 있는 구릉이 없어 홍수를 만나면 포구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커다란 결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대안의 송파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서편의 두모포만큼도 은성(殷盛)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장기보관을 하지 않아도 되어 홍수의 피해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시목이나 숯은 뚝섬에서 많이 거래가 되었다고 한다.
  • 송파[送波]·삼전도[三田渡]
  • 송파와 삼전도 일대는 용산이나 서강·마포 등지보다 서울에서의 거리도 멀었을 뿐 아니라 또한 그 성격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었다. 즉, 송파는 용산이나 서강과는 달리 같은 강변취락이긴 했으나, 육로로 외방에서 들어오는 각종 물자도 합쳐져서 일찍부터 규모가 큰 독자적인 상설장시가 섰다는 점에 특색이 있었던 것이다.
  • 당시에는 육로수송이 곤란했기 때문에 한강상류에도 조창이 있어 경상도 북부와 충북 일대의 세곡을 보관하던 충주의 가흥창을 비롯하여 원주에 흥원창, 춘주에 소양강창 등이 있어 세곡운반을 위해 일찍부터 강상선의 운행이 잦았으며, 또한 북한강 상류에 낭천·춘천·가평 등의 강항이 있었고, 남한강 상류에도 정선·평창·영월·단양·충주·여주 등의 강항이 있어, 각 지방의 산물이 서울 수송과 서울에서 상류로의 어염·미곡·면포·비단 기타 각종 잡화류의 수송과 판매 때문에 경강상인과 각 강항에 위치한 여각·객주들과의 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한강상류 강항들과의 거래에 있어 그 주도권을 잡은 것은 바로 송파의 상인들이었으니, 그것은 송파가 지닌 지리적 여건이 두모포나 뚝섬 등 다른 강촌들보다 우월했기 때문이며, 동시에 이곳은 광주군에 속해 있어 금난전의 권외(圈外)에 위치했기 때문이었다.
  • 『만기요람』재용편에 의하면 안성읍내장, 은진강경장, 덕원원산장 등과 함께 전국 15대 장시 중의 하나로 송파장이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송파장은 이름이 장시였을 뿐 실제상으로는 다른 장시들처럼 5일장이 아닌 상설시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서울 성중(城中)의 사상들과 결탁하여 삼남지방과 동북지방에서 오는 상인을 유인하고 그 상품을 매점하는 등 대규모의 도고상업을 전개하였으므로 성내의 시전상인들에게는 큰 타격을 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시전상인들의 항의가 잇달아 송파장시가 물의의 대상이 되자 평시서제조는 도성 내 시전상인들의 이익을 옹호하여 그 폐지를 주장하였으나, 현지수령인 광주유수는 그 폐지를 반대하여 논란을 거듭하다가 마침내는 폐지하지 않기로 결정 되었다. 그러므로 송파의 상설화된 장시는 계속 번창하였고, 이후 사상도고들의 근거지가 되어 착실히 성장해 갔던 것이다.
  • 이상에서 광나루, 두모포·뚝섬, 송파·삼전도에 대한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았는데 이 밖에도 현재 강동구 고덕동에서 토평리로 건너가는 나루터가 1970년대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나루 이외에 강동구에 여향을 끼쳤던 나루는 상류부터 당정나루, 덕소나루, 미음나루, 토막나루, 참앞나루 등이 있었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의병전쟁기의 강동지역

  • 일제시대 이미지 1876년 개항에서부터 1910년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기까지 우리 민족운동의 과제는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고 안으로는 조선왕조의 전제주의체제를 무너뜨리고 국민주권이 실현된 근대 국민국가를 수립하는 일이었다. 자주적 근대 국민국가의 수립이라는 당면한 역사적 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당시의 민족운동은 갑신정변과 갑오농민전쟁, 독립협회운동, 의병전쟁, 애국계몽운동으로 이어졌다.
  • 초기 의병전쟁은 봉건 유생층과 갑오농민전쟁의 잔여 농민군 세력이 일으킨 반외세 운동으로 출발했다. 제1단계 의병은 을미의병으로 위정척사운동을 계승한 유생들이 명성황후 살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일으켰다가 아관파천으로 해산했다. 이 시기에는 제천의 유인석 부대, 춘천의 이소응 부대, 선산의 허위 부대등이 유명했다. 이들 부대는 유생들이 지휘부를 이루어 유교적 근왕주의에 입각하여 존왕양이를 내세웠다. 따라서 이들은 국왕이 회유조칙을 내리자 모두 해산했다. 반면, 갑오농민전쟁의 반외세 반봉건노선을 계승한 농민층의 항쟁은 계속되어, 제주도에서는 ‘방성칠의 난‘이 일어나고 활빈당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 유인석이 충주성에서 싸울 무렵, 강동 지역이 속했던 경기도 광주를 비롯한 여주, 이천 등지의 경기지역 의병부대는 광주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일전을 수행했다. 단발령이 발포된 직후, 조성학, 구연영 등이 군사를 모아 이천에서 정식으로 의병부대를 결성했는데, 민승천이 창의대장이었고, 조성학이 도총을 맡았다. 1896년 1월 18일 일본군 수비대가 쳐들어오자 매복작전으로 격퇴했는데, 패주하는 적을 광주군 장항 장터까지 추격하여 무기와 군량을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후 의병부대는 광주, 이천 등지를 거점으로 이현, 원산, 여주, 양지 등지를 엄중 경계했다.
  • 2월 13일 이현에서 적군의 급습을 받은 의병부대는 타격을 입고 흩어졌으나, 곧 수습하여 2월25일 다시 이현으로 모였다. 김하례가 주동이 되었던 광주지역 의병부대는 광주군수 박기인을 처단하고 이현으로 왔다. 이때 이현에 모인 연합병력은 2천 명을 헤아렸는데, 지휘부도 재편성하여 박준영이 대장이 되었고 김하락이 군사 겸 지휘를 맡았다. 한층 정비된 의병부대는 2월28일 광주의 남한산성으로 이동해 새로운 주둔지로 삼았다. 남한산성은 서울의 동태를 한눈에 살필 수 있고 저장된 무기와 지형 등 장기전에 대비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 이에 친일정권은 관군을 출동시켜 성을 포위하고 여러차례 공격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이 와중에 좌익장 김귀성이 관군에게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관군측은 그에게 수원 유수를, 의병진 대장 박준영에게는 광주 유수를 약속하며 간계를 썼는데, 포로가 된 김귀성이 성 안의 박준영과 내통하였다. 박준영이 군사들을 술로 곯아떨어지게 한 다음 성문을 열어 놓아, 마침내 남한산성은 함락하게 되었다. 구연영 등 의병 간부들은 일단 영남지방으로 가서 의병을 재소집하기로 하고, 3월 27일 잔여병력 9대를 거느리고 영남 쪽으로 이동하였다.
  • 제2단계 의병은 을사의병으로 제1차 의병세력과 농민항쟁세력이 결합하여 ‘을사조약’ 체결을 계기로 일어났다. 이 시기에는 원주의 원용팔 부대, 충청도 홍주의 민종식 부대, 전라도 태인의 최익현 부대, 경상도 영천의 정용기 부대 등이 유명했는데 영해에는 평민출신으로 의병장이 된 신돌석이 이끄는 부대가 있었다.
  • 제3단계 의병은 1907년 군대해산을 계기로 해산군인과 제2단계 의병세력이 결합하여 일어났는데 그 규모와 성격면에서 일대 전환기를 가져왔다. 해산군인의 합세로 크게 병력이 강화된 의병부대들은 서울 진격을 위해 연합전선을 형성했다. 이인영을 13도 총대장, 허위를 군사장으로 하여 약 1만명의 병력이 양주에 집결하여 서울 진격을 감행했으나 실패했다. 이전의 단계가 양반유생 출신 의병장을 중심으로 고립 분산적으로 싸웠고 그 성격도 근왕적인 면이 강했던 반면, 이 시기에는 평민 출신 의병장이 많이 등장했고 또 합동작전을 펴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그 성격도 근왕적 한계를 벗어나 항일과 반봉건투쟁의 측면이 뚜렷해져 민족해방운동으로서의 성격을 보여주였다.
  • 이 무렵 광주 지방에서 활동한 의병부대는 이익삼 부대, 서가 부대, 윤전 부대, 임문순 부대, 권동설 부대, 성주사 부대, 고재석 부대, 이근풍 부대 등이었다. 1908년 1월 7일 의병 약 20명이 광주 동남방 경안면에서 교전하였고, 1908년 6월 27일 의병 약 20명이 광주 남방 20리 지점에서 교전하였다. 이 당시 광주지방의 의병은 대부대가 아니라 20여명 단위의 소부대 단위로 활동했는데, 게릴라전에 용이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강동지역 3·1운동

  • 일제 식민지시대의 본격적인 민족해방운동은 3·1 운동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합방’후 조선총독부는 이른바 ‘105인사건’을 조작하여 국내에 남아있던 애국계몽운동 세력을 탄압했다. 이로 인해 민족해방운동 세력은 타격을 입고 기회를 기다리다가, 제1차 세계대전 종결 후 민족자결주의가 선포되자 이를 하나의 기회로 이용했다.
  • ‘합방’후 10년 동안 농민들은 토지조사사업으로 타격을 입었고, 민족 자본가 층도 회사령으로 타격을 입었다. 노동자 역시 낮은 임금과 긴 노동시간, 비인간적 대우, 민족적 차별 등으로 고통을 받았다. 이처럼 사회구성원 각계각층은 식민통치의 피해를 입으면서 정치의식을 높여갔다. 여기에 일부 학생, 종교인, 지식인들이 불을 지르면서 3·1운동은 전 민족적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 ‘민족대표’ 33인은 조선 독립을 선언하며 운동을 촉발시켰지만, 이들의 역할은 대중운동을 현장에서 지도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이후 청년, 학생, 교사 등 지식인과 도시노동자 및 상인층에 의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3월 2일 서울에서는 노동자 400여명이 만세 시위를 했고, 22일에는 남대문 부근에서 노동자 800명이 ‘노동자 대회’의 깃발을 들고 시위했다. 이후 운동은 도시로부터 전국의 각 농촌지방으로 확산되어 전국의 시골장터에서는 거의 1년 반 동안이나 만세시위가 계속되었다.
  • ‘민족대표’들은 최고 3년형을 받았지만 일제의 회유정책으로 형기 전에 모두 풀려났다. 하지만, 약2백만 명으로 추산되는 시위 참가자들 중 7,500여 명이 피살되었고, 4만 6천여 명이 검거되었으며 약 1만 6천 명이 부상당했다. 또한 715호의 민가와 49개의 교회와 학교가 불탔다.
  • 3·1운동은 항일운동이면서 대내적으로는 공화주의 운동이었다. 따라서 이 운동의 결실로 수립된 임시정부들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공화주의 정부였다. 또한 이 운동은 무장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대중운동을 고양하고 국내 사회주의 운동이 대두하는 계기가 되었다.
  • 강동 지역이 속한 경기도 광주군 역시 3월 중순부터 4월 상순에 걸쳐 각 면을 중심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광주군의 첫 만세 시위는 3월 12일 이병승과 문홍규의 주동으로 실촌면에서 일어났다. 이병승이 실촌면 사무소 앞에서 선언문을 낭독하자 만세소리가 일대를 진동하였다. 실촌면장 구연복 도 문홍규의 권유로 참여하여 관민이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군중들이 곤지암으로 향하는 도중 헌병들이 발포하여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이병승은 강원도 방면으로 피신하였고, 문홍규는 체포되어 6개월간 미결수로 있다가 태형을 받고 방면되었다.
  • 3월 19일에는 경안면에서 약 1천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는데, 헌병의 무차별 총격으로 5명이 사망하고 5명이 상해를 입었으며 77명이 검거되었다. 중대면 송파리에 거주하는 장덕균과 김현준은 3월 21일 독립선언문을 등하하여 송파리 주민들에게 배부하며 독립의식을 고취하였다. 3월 26일에는 중대면 송파리와 수서리를 중심으로 약 600여명이 천중선의 인솔 하에 만세운동을 전개하여 13명이 검거되었다. 같은 날 동부면에서도 이대헌등 수십 명이 시위하였으며 1명이 피검되었다. 이어 이대헌은 27일 30여 명을 인솔하고 동부면사무소 앞을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또 같은 날 동부면 망월리 구장 김교영도 9명을 인솔하고 민세시위를 벌였다.
  • 이날 동부면의 만세시위는 500여명의 주민이 합류하면서 크게 확대되었는데, 14명이 피검되었다. 또한 이 날 오포면에서는 정제화외 40여명이, 경안면에서는 수 천명이, 언주면에서는 수 백명이, 중대면에서는윤도길등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 날 서부면 감일리에 사는 구의서는 40여 명과 함께 서부면사무소 앞에서 출발해 상일리 헌병주재소 앞까지 시위행진을 벌였다.
  • 5일장이 열리는 장터를 이용해 운집한 주민들이 만세를 불렀던 다른 지역과 달리, 강동 지역에는 5일장이 없었기 때문에 만세를 부르기 위해 사발통문으로 날짜를 정해 사람들을 모았다. 그 당시 강동지역의 유일한 상업지역은 상일리였다. 따라서 일제는 순사주재소를 상일리에 두고 구천면, 동부면, 서부면 3개 면을 관할했다.
    상일리는 이 3개 면이 접해 있는 중심지여서, 이 3개 면의 주민들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 구천면의 만세시위운동은 구천면·동부면서부면의 3개 면민이 집결하여 전개한 대규모의 시위운동이었다. 구천면 내의 만세시위는 3월 27일 면의 서남단인 길리에서 발단되어 면의 동북단인 상일리로 발전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날 오전 길리에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어 면내 지역을 순회하며 시위하는 동안 명일리와 암사리 등지를 거치면서 시위 군중의 수는 500여명으로 증가되었고, 저녁 무렵에는 헌병 주재소가 있는 상일리로 집결하였다.
  • 이 곳에서 각각 면내 지역에서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단 해산한 후 다시 이 곳까지 이동해 온 서부면·동부면의 면민들과 합세해, 1,000명 이상의 군중이 모여 대규모 시위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시위 군중은 점차 과격해지기 시작하였고 군중 1,000여 명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헌병주재소 안으로 몸싸움을 하며 밀고 들어가려고 했다. 이에 진압 헌병 측에서는 강력히 대응하여 밀고 밀리는 형세가 한동안 전개되었다.
  • 이런 가운데 주재소 부근 대여섯 군데 높은 지역까지 군중들이 운집하여 주재소를 완전히 포위하게 되었으며, 군중들은 돌을 던지면서 쇄도하였다. 이에 진압 헌병은 무차별로 총을 쏘아, 1명이 죽고 2명이 부상당하였으며, 시위군중도 해산하게 되었다.
  • 그 때 마나세시위의 선봉에 선 사람은 김경배였는데, 만세를 외치기 위해 입을 크게 벌리는 순간 함성소리에 놀란 일제 경찰이 총을 들이대 쏘아버렸다. 총알은 관통되어 김경배는 쓰러졌고, 군중들은 흩어졌다. 시위에 앞장섰던 김경배는 이후 ‘만세참봉’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다가, 1949년 80세의 고령으로 죽었다. 8·15 해방후 매년 3·1절에 상일 초등학교에서 연설을 하던 김경배의 회고에 의하면, 3·1운동이 일어난 직후 사흘째 되던 날 상일리에서 거사를 모의했다고 한다.
  • 3·1운동에 대한 폭압적 탄압과 함께 일제는 우리 역사를 왜곡했는데 강동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전부터 명일리에 가서는 키 큰 체 하지 마라는 말이 있었다. 명일리 사람들은 대체로 키가 큰 편이었고 승상산(丞相山:일명 聖三峰)에서 장차 큰 장수가 태어날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일제는 쇠말뚝을 박고 산 이름을 수상산(水相山)으로 바꾸어 버렸다. 또 명일리에서 서부면으로 넘어가는 곳에 옴메기 구덩이가 있는데, 이곳에서 용마가 나온다는 전설이 있었다. 이 구덩이에서는 언제나 찬물이 솟아서 나무꾼들이 옻에 오르면 이 물로 깨끗이 낫게 하였다고 한다. 이 역시 일제는 산허리를 끊어버리고 옴메기 구덩이를 메꾸어 버렸다. 그러나 1923년 구천보통학교(지금의 상일초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한 최문찬 교장은 학교 울타리에 무궁화나무를 심고 가꾸어 제자들에게 무언으로 우리의 얼을 심어 주었다.

1952년 대홍수와 강동 지역의 참화

  • 일제강점시대에는 1914년, 1920년, 1925년에 세 번의 큰 홍수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1925년 을축년의 홍수는 미증유의 사태였다. 이 때의 홍수는 7월 9일 ~ 12일, 15일 ~ 19일 두 번에 걸쳐 연이어 발생했다.
  • 1차 홍수 때는 6일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9일 ~ 11일 사이에 폭우가 쏟아졌다.
  • 6일부터 11일까지 내린 비의 양을 보면, 북한강 유역에서는 가평이 352㎜로 최고를 기록하였고 회양이 181.3㎜로 최저였다. 한강 본류 및 남한강 유역에서는 경성이 387.3㎜로 최고를 기록했고 영월이 126.5㎜로 최저였다. 이때 강동 지역이 속한 광주는 313.2㎜를 기록했는데 특히 비가 많이 내린 지역 중 하나였다.
  • 1차 홍수 때인 12일 한강 수위는 욱천양수표(旭川量水標)에서 이미 11.78m에 달해 1920년 홍수 때의 최고수위를 넘어섰다. 이에 따라 서울을 비롯해 고양, 김포 등지가 물에 잠겼는데, 광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 1차 홍수 때 불어난 물이 채 빠지기도 전인 15일부터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하여 16일에서 18일 사이에 집중호우가 있었다. 2차 홍수 때는 북한강 유역에 특히 비가 많이 내렸는데, 15일부터 18일 사이의 강우량을 보면 양구가 519.4㎜로 최고를 기록했고 최저인 회양도 312.8㎜나 되었다. 한강 본류 및 남한강 유역에서는 의정부가 443.5㎜로 최고였고 단양이 170.3㎜로 최저였다.
  • 이 때는 아직 저수댐이 하나도 없는 실정이어서 한강 상류인 북한강 및 남한강 유역에 집중적으로 내린 비는 곧바로 한강 본류로 흘러들었다. 한강 제방은 1920년 홍수 때의 최고 수위인 11.78m(욱천양수표 기준)를 참작하여 13.2m로 만들었는데, 2차 홍수 때는 13.86m여서 한강제방을 범람하였다. 양수리에서 행주산성에 이르는 한강 연안 전 지역에서 범람이 있었는데, 뚝섬 일대, 용산 지역, 마포, 서강, 여의도, 영등포, 왕십리 일대의 가옥이 전멸되었다. 전차의 운행이 중지되고 철도의 모든 선로가 운행할 수 없었으며 통신과 우편이 두절되었다. 이때 강동 지역 역시 피해가 컸다. 구천면 풍납리는 피해가 막심하여 전 부락이 유실되어 그 흔적도 남지 않았다고 한 당시의 기록은 그 참상을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다. 풍납동에서 왕십리까지 배로 다녀야 할 만큼 피해가 컸는데, 옹기를 굽던 200채의 가마와 집 등이 모두 물에 잠겼다. 신천·잠실 등 송파 지역 역시 전 부락이 유실되었는데, 이때의 홍수로 한강의 흐름이 바뀌어 송파 마을 사람들은 이 곳을 버리고 현재 송파동으로 되어 있는 가락동 지역으로 옮겨와서 살게 되었다.

새로운 상권의 형성

  • 1876년 개항이후 외국 자본주의 세력의 침투가 본격화되자 토착자본도 여러 가지 형태로 대응해 갔다. 먼저, 갑오개혁 때 육의전의 금난전권이 폐지됨으로써 특권성이 없어진 서울의 시전상인들은 황국중앙총상회를 조직하여(1898), 외국 상권을 제한하고 자기들의 상권을 보호하려 했다. 이들은 독립협회의 정치활동에 동조하여 철시(撤市)를 단행하기도 하면서 상권수호운동을 적극적으로 펴나갔으나, 독립협회와 함께 정부에 의해 해체되었다. 일본인들이 증기선으로 세곡(稅穀)운반을 독점함으로써 타격을 받게 된 경강상인 중 일부는 기선을 구입하여 이에 대응하기도 했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미곡 유통업에서는 ‘을사조약’전까지는 상권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개성상인들도 서울 이북지방에서는 계속 상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객주와 여각들은 개항 초기에는 개항장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했으나, 1890년대 이후 외국 상인들의 내륙행상이 본격화되면서 개항장 객주의 역할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개항 후의 상권 변화는 종래의 유통체계에 변화를 초래했다. 조선 후기부터 성행했던 송파장은 1876년 개항 이후 일시에 쇠퇴하기 시작했다.
  • 갑오개혁으로 육의전의 금난전권이 폐지되자, 시전상인과 사상도고의 구별이 없어지면서 송파시장의 존재가치가 없어지게 되었다. 또한 철도나 선박 같은 새로운 근대적 교통시설이 도입됨으로써 종래 교통중심지에 위치했던 송파시장의 상권이 제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일제강점시대로 접어들면서 송파시장은 공설시장으로 그 명맥을 이어갔으나 일반 시장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도 특색이 있다면 우시장이 있었다는 점이었는데, 경기도 내의 15개 우시장 중에서 4,5위를 점할 정도로 거래가 성했다. 그러나 1925년 대홍수로 송파부락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려 주민들이 가락동으로 이주하게 된 데다가, 1929년에는 동대문 밖 숭인동에 도수장(도수장)이 설치되면서 우시장 역할도 병행하게 됨에 따라 송파장의 우시장은 쇠퇴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구천면 지역에 새로운 상권이 형성됨으로써 송파장의 쇠락은 가속화되었다.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의 유지 조항년 외 16명은 암사리에 시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오던 중 1925년 가을 경에는 개시일까지 잡았으나, 송파시장의 유지 및 주민들의 반대 때문에 부득이 중지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구천면에 새 시장이 생기면 송파시장의 존속여부가 불투명해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양측이 대립하던 중 1927년 봄에는 구천판매장합자회사로 명칭을 변경하여 경성부 당국에 인가 신청을 냈다.
  • 이 회사의 최초 목적은 시장을 유치하는 것이었지만, 송파 주민의 반대로 여의치 못하자 발기자들은 회사 명칭으로 12일 개업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중대면의 송파 주민들은 송파 시장이 폐지가 될까 우려하여 대책을 강구하게 되었는데, 1927년 11월 26일 오후 7시 송파 주민들은 송파리민대회를 개최하였다. 이에 21일 11시 송파구장 강윤성과 송파청년회장 김동식을 필두로 하여 리민대회에서 선출된 위원7, 8명 외에 30여명이 구천판매장에 난입하여 매매를 방해하기도 하였다.
  •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에 의하면, 구천판매장합자회사는 설립일이 1927년 9월 27로 되어 있으며, 주소는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암사리 528-2이다. 자본금은 20,000원이며, 해산물을 구입하여 위탁판매하고 운송하는 것이 이 회사의 주 업무이다. 사장은 조항년이며 사원으로는 유희민, 서상철, 산본매길(山本梅吉), 유병찬 외 11명이다.
  • 시장의 발전은 그 지역의 인구수와도 연관되는데, 1925년에는 구천면, 중대면, 언주면, 대왕면 4개 면 중에서 제일 인구가 작았던 구천면이 빠르게 성장하여 1944년에는 언주면을 제외한 3개 면의 인구가 거의 비슷하게 되었다. 8·15이전까지 구천면에서 인구가 제일 많았던 곳은 암사리였고 그 다음이 성내리였다. 그래서 국민학교 운동회 때 마을대항 줄다리기나 모래가마니 메고 뛰기를 할 때면 언제나 서로 맞수가 되었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8·15 해방과 강동지역

  • 8·15이후 관련이미지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으로 조선에서는 새로운 민족독립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 민족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민중적 요구는 건국주비위원회의 건설로 현실화되었으며, 건국준비위원회는 8월 말까지 전국적으로 145개에 이르는 지부를 결성하였다. 건국준비위원회 지부는 각 지방에서 식민지 국가기구가 사실상 기능을 정지한 상태에서 치안, 행정 기능을 담당하면서 자치행정조직으로 발전하였다.
  • 그러나 우리의 민족해방운동세력 중 어느 세력도 연합국의 일원으로 승인 받지 못한 상황에서, 한반도는 미군과 소련군 양군에 의해 38도선을 경계로 분할 점령되었는데, 미군은 1945년 9월 6일 서울에 진주했다. 연합국은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카이로 회담과 포츠담 회담을 통해 즉각적인 독립이 아니라 일정 기간 동안 한반도를 연합국의 공동관리 하에 두는 것으로 합의 하였다.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미소 양군은 전시 중의 합의를 매듭짓기 위해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를 개최했다. 회의 결과 최장 5년간의 식탁통치가 결정되었다. 이로 인해 국내에서는 신탁통치 찬반문제로 좌우익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 가운데 미국과 소련은 3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1946년 3월 20일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 했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는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함께 협의할 정당사회단체를 선정하는데 합의를 보지 못하여 결국 결렬되었다. 제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직후 이승만은 정읍발언을 통해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제기하여 한국민주당을 비롯한 우익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이 행의 유엔총회에서 미국 국무장관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포기하고 조선문제를 유엔에 이관하려는 태도를 분명히 했다. 이에 대해 소련대표는 조선문제를 유엔에 제의하는 것은 미소 사이의 협정을 위반하는 것이라 하여 반대하였다.
  • 그러나 미국대표는 유엔 임시조선위원단을 설치하고 그 감시 하에 1948년 3월 말까지 남북에 걸친 자유선거를 실시하여 국회 및 정부를 수립하고 미소양군이 철수한다는 결의안을 유엔에 제출하였으며, 유엔은 이를 결의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에 대해, 중도파를 중심으로 하여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 등 단정을 저지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남북에 각기 분단국가들이 수립되었다. 남한만의 5.10 총선거에는 좌익은 물론 우익세력의 일부와 중간세력도 참가하지 않았는데, 이승만계의 국민회와 한국민주당 등 이승만 지지세력이 압승하였다. 선거 결과 무소속 85명,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이승만계) 53명, 한국민주당 (김성수계) 29명, 대동청년단 (이청천계) 14명, 민족청년단 (이범석계) 6명, 기타 단체 11명이 당선되었다.
  • 이 때 강동 지역이 속한 경기도 광주군에서는 신익희(申翼熙)가 당선되었다. 신익희는 당시 입법의원 의장이자 자유신문사 사장의 자격으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으로 출마했는데, 구천면에서 몰표가 나왔다. 6·25 전쟁과 1950년대의 강동 지역 6ㆍ25 전쟁은 미소의 분할점령과 그것에 따른 남북 분단국가들의 성립이라는 외적 요인, 일제시기 민족해방운동과정에서부터 있어온 민족사회 내부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이라는 내적 요인, 그리고 남북 분단국가들 사이의 여러 가지 대결요인들이 요인이 되어 발발했다.
  •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인민군의 주력부대는 파죽지세로 개전 4일 만인 28일 새벽 1시경 벌써 미아리고개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에 따라 28일 새벽 2시 30분경 한강인도교와 3개의 한강철교가 폭파되었다. 광진교는 이보다 약 1시간 반 뒤에 폭파되었다. 한강교량이 파괴된 극도의 혼란 속에서 국군은 28일 아침 한강을 건너 철수하기 시작했다. 미아리 정면에서 인민군을 저지하던 혼성병력은 광나루나 뚝섬을 비롯하여 마포ㆍ하중리 (서강)ㆍ서빙고ㆍ한남동의 나루터를 통해 철수했다. 광나루를 거친 병력은 수원으로 집결했고 서빙고와 한남동, 뚝섬을 경유한 병력은 시흥과 수원으로 집결하였다.
  • 북한의 김일성 정권은 남한지역 점령지에서 인민민주주의혁명의 연장선상에서 점령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사회경제적 정책으로는 토지개형, 노동법령 실시, 농업현물세제 실시, 친일파 및 친미파의 숙처 등이 주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북한의 점령정책은 대체로 강동 지역에서도 실시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쟁의 발발과 함께 구천면에서도 명사무소에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다. 38선 이남 1,526개 면 중에서 1,198개 면에서 토지개혁이 완료되었다. 점령지역에서 몰수한 토지의 약 38%가 국유화되었고 점령지역 총 농가의 66%가 몰수토지를 분배받았으며, 농민들이 미리 지주에게서 구매한 토지에 대한 부채가 폐지되었다. 그러나 유엔군에 의해 남한지역이 수복되면서 김일성 정권 하에서 실시된 토지개혁은 파기되었고, 그 토지는 다시 지주들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이 토지개혁으로 남한의 지주세력은 크게 약화되어 이루 이승만 정권의 농지개혁에 조직적으로 반발하지 못하였다.
  • 9월 15일 새벽 UN군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가 전함 261척과 미 해병 제 1사단과 한국 제 1해명연대를 진두지휘하여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월미도에 상륙하고 연이어 미군 보병 제 7사단이 인천해안의 3개 지점에 상륙하였다.
    유엔군은 서울을 향하여 부평, 소사, 경인가도와 김포공항 일대에서 인민군을 격퇴하고 18일 영등포지역을 공격하였다. 인민군 사대는 한강뚝방의 사수에 주력하였으나 연합군 전투부대는 대공세로 9월 19일 한강이남 강뚝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9월 20일 미해병사단 1개 연대와 국군해병 1개 대대가 서울의 서쪽 마포와 서대문에 있던 적의 방위선을 공격하고, 미 17연대는 강남에서 한남대교 동쪽으로 아침 일찍 수륙양용장갑차로 한강을 도강하여 서울로 들어갔다.
    이렇듯 연합군의 합동작전이 전개되어 1주일 후인 9월 28일 서울탈환이 이루어졌다. 미 7사단 17연대는 한남동, 이태원, 청량리를 거쳐 이천, 충주, 금천, 대구 방면으로 남하하면서 부산으로 집결했다. 이 때 이미 폭파된 광진교에 부교를 설치하여 강을 건너 구천면 길을 통해 관주를 경유하여 이천으로 들어갔다. 서울을 탈환한 후 국군과 유엔군을 38도선을 넘어 (9월 30일) 평양을 점령한 (10월 19일) 후 계속 진격하여 한중 국경선 근처인 박천, 태천, 운산, 희천, 이원을 잇는 선까지 나아가고, 그 일부가 10월 26일 압록강변의 초산까지 진격하였다.
  • 그러나 10월 25일 중국군의 개입으로 다시 전세는 역전되어 국군과 유엔군은 총 퇴각하였으며,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의 철수가 이루어졌다. 이후 전쟁은 소련의 유엔대사 말리끄의 휴전제의, 미국 정부 내의 전쟁확대론과 반대론의 대립 과정을 거쳐,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휴전으로 종결되었다.
  • 전쟁은 만흥 전재민을 남겨 놓았는데, 성내동 등지는 들판이 넓고 땅값이 싼데다가 생활 용수를 쉽게 구할 수 있어 전재민들이 정착하기에 적합했다. ‘1ㆍ4 후퇴’ 이후 강동 지역에는 한강 이북으로부터 피난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철원, 금화, 양구, 연천 등지의 주민들이 유입되었는데, 쌀 배급통계의 의하면 무려 30만 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길가나 창고 등지에서 지내다가 야산에 움집과 판자집을 짓기 시작했는데, 천호동과 성내동은 그때부터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 암사동에는 ‘복지말’ 이라는 마을 이름이 전해지는데, 1957년에 이석겸, 김재홍 두 사람이 월남피난민을 위하여 새로 농장을 만들어 복을 받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또 둔촌동은 1963년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북쪽의 길리와 합하여 선린동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본래 1955년 최문환 목사가 이 지역에 새로 마을 조성하여 전쟁으로 인해 양산된 부랑자나 걸인 등을 수용하여 자활촌을 만들고 이들이 모두 좋은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선린촌이라 한데서 유래한 것이었다.
  • 서울시로 편입되기 전인 1950년대의 강동 지역은 전형적인 서울 외곽의 농촌지역이었다. 하지만 대도시 서울 주변이라는 특성 때문에 일찍부터 근교농업이 발달하여 채소류와 과일이 많이 재배되어 일반적인 농경지역과는 달랐다.
    또한 토양조건 때문에 일찍부터 기와나 옹기, 벽돌을 생산하는 요업이 발달하였다. 여기에 강동 지역에 정착한 전재민들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강동 지역에서는 요업 산업을 중심으로 제조업이 발달하여 1970년대 초까지 영등포 가는 준공업 지대로 성장하게 되었다.

개발시대의 강동지역

  • 1962년 11월 21일에 법률 제 1172호로 공포된 [서울특별시 도ㆍ군ㆍ구의 행정구역 변경에 관한 법률]애 의해 서울시가 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확장함에 따라,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은 중대면, 언주면, 대왕면 일부와 함께 서울시 성동구로 편입되었다. 편입될 당시 구천면의 면적은 34.4였고, 인구는 20,280 명이었는데, 면적은 언주면보다 작아 편입된 4개면 중에서 두 번째였지만 인구는 제일 많았다. 이후 강동 지역은 1975년 10월 대통령령 제 7816호로 강남구가 성통구로부터 분리 신설되면서 강남구의 관할지역이 되었다가, 1979년 10월 1일 대통령령 제 9630호에 의해 강동구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강동 지역의 개발은 1970년대 초반부터 이미 시작되어, 대규모 주택지가 조성되기 시작했고 교통 중심지로 발돋움하면서 유통 서비스업도 발전하게 되었다. 그 결과1988년 1월 1일에는 대통령령 제12367호에 의해 강동구의 일부가 송파구로 분리 신설되었다.
  • 우리 사회는 1960년대 이후 급속한 공업화 과정을 겪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정치 경제의 중심지로 수도 서울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급격하게 발전하게 되었는데 그에 따른 문제점도 많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67년을 기점으로 서울시의 주택사업 방향이 단독주택 중심에서 공동주택 즉 연립주택이나 아파트 중심을 전환되게 되었다. 이후 강동구 일대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면서 서울에서 인구증가율이 가장 두드러진 곳이 되었다. 1979년 강동구가 신설될 당시 인구는 444.265명이었는데, 이것을 1975년 강남구가 신설될 당시의 강동 지역 인구 302,961명과 비교해 보면 46% 가량 증가한 것이다. 또 1988년 송파구가 강동구로부터 분리된 상태에서도 당시 강동구의 인구가 488,607명이었던 것을 감안해 볼 때 강동구의 급격한 인구 증가 추세를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다.
  • 1946년에 광진교가 준공되면서 일찍부터 개발된 천호동 구사거리는 강동구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주택지가 저지대에 위치하여 새로운 도시계획에 의해 개발될 필요가 있었다. 여기에 서울시의 주택문제가 겹치면서 천호토지구회정리사업이 입안되었다. 이 사업은 도심지에서 약 15km에 위치한 천호동을 중심으로 인근의 길동, 성내동, 둔촌돈, 명일동 일부를 포함한 약 6,611,570.2m의 토지를 대상으로 하였다.
    이 사업에 포함된 천호동 지역은 천호 1동, 3동 중 둔촌로에 접한 주변지역이었다. 사업 시행 중인 1876년에 천호대교가 준공됨으로써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천호대교는 도심을 연결되는 3ㆍ1 고가도로와 천호동을 이어주게 되어 천호동 일대는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천호대교의 준공과 천호토지구획정리사업의 결과, 천호대로와 지금의 선사로가 교차되는 지점에 신사거리가 형성되어 종래의 천호 구사거리를 대치하며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로 발돋움하였다.
  • 1963년 서울시로 편입될 당시만 해도 주민의 약 70%가 농업에 종사하던 길동 지역에는 이 사업을 통해 아파트가 많이 세워지게 되었다. 1974년 영세민을 위한 길동 시영아파트가 준공된 이후 많은 아파트들이 들어서 급격한 이구 증가를 가져왔다. 개발 이전인 1972년 법정동, 둔촌동을 포함한 행정동 길동의 인구가 7,815명이던 것이 1988년에는 길 1,2동을 합해 49,405명으로 약 6배 가량 늘어났다. 여기에 천호대교에서 천호동, 길동을 지나 상일동의 시경계로 이어지는 천호대로가 1976년 준공되어 이 지역의 개발이 더욱 촉진되었다.
    또한 풍납로 좌우 도로변 일대와 풍납로와 통하는 성내동길 좌우에 주택지가 조성 되었으며, 명일동도 새로운 주택지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둔촌동 역시 천호대로와 더불어 강동대로, 둔촌로 등의 간선도로가 준공되어 교통사정이 좋아짐으로써 새로운 주택지로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천호토지구획정리사업에 이어 암사동토지구획정리사업이 1976년 4월에 시작되어 1980년 12월에 완료되었다. 이 사업은 천호동, 암사동 일대 약 1,695,867.8m를 대상으로 실시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80년 암사동토지구획정리사업이 완료되면서 조성된 택지 위에 암사 시영아파트, 강동아파트 등 대단위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이 사업에 포함된 천호동 지역은 천호토지구획정리사업에서 빠진 천호2동과 4동 일대였다.
  • 두 차례의 토지구획정리사업에 이어 고덕지구 택지개발사업이 1982년 5월에 시작되어 1985년 말 완료되었다. 고덕지구는 도심으로부터 약 16km, 천호동 중심부에서는 약 2km가량 떨어져 있는 대단위 자연녹지지역이었기 때문에 주거지 개발로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 사업에 포함된 지역은 고덕동, 명일동, 상일동 일대였는데 초 면적 3,148,444.7m (약 105만 평) 에 인구 76,010명, 19,010 가구를 수용하려는 계획이었다. 총면적 중 약 65%인 2,040,106,1m는 주거용지로 설정되었는데, 주거용지 중 주택용지는 1,751,433.6m이며 그 80% 정도가 공동주택용으로서 대규모 아파트단지로 건설되었다. 주거용지를 제외한 103,338.6m는 중심 상업지구로 설정되었다.
    고덕동은 사업 총 면적 중 52% 1,580,597.3m를 점유하고 있어 고덕지구 3개동 가운데 가장 면적이 크다. 한국토지개발공사가 택지를 조성한 뒤에 주택공사가 제 1,2,8 단지에 아파트를 짓고 서울시가 고덕시영아파트를 짓는 등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단독주택 단지가 조성되었다.
  • 1972년 천호토지구획정리사업에 포함되면서부터 농촌지역에서 도시화된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한 명일동은 고덕지구 택지개발사업에 포함되면서 본격적으로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서울 외곽지대의 주요 주거지역이 되었다. 명일동은 이 사업의 총면적 3,040,106.1m 중에서 주거용지 454,773.4m와 상업지역 108,338.6m를 점유하고 있다. 명일동은 고적지구 중 본택지 규모가 제일 작으나 고덕동, 상일동이 27평의 이하의 중층아파트 단지로 구성된 것과 달리 30평 이상의 고층아파트 단지와 단독 주택 단지로 구성되어 있다. 또 명일동 62번지 일대에는 중심 상업용지가 조성되어 있어 고적지구 내에서도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 전형적인 농촌지역이던 상일동은 이 사업으로 크게 변모되었다. 상일동은 이 사업의 총면적 중 1,004,735.4m를 점유하고 있다. 대한주택공사가 주공아파트 제 3,4,5,6,7단지를 건립하였다. 상일동 아파트단지에는 총 5,650세대 분 152동의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데, 이는 고덕지구 내에서도 주거단지 규모가 가장 크다. 이처럼 상일동은 계획적이고 이상적인 도시설계에 따라 개발되었다. 따라서 상일동 산18번지 외 86필지 591,516m 부지에 대단위 근린공원인 명일근린공원을 1988년부터 2007까지 조성하여, 공원시설 및 교양시설, 운동시설을 갖추고 지역 주민의 보건과 휴양을 돕는다. 명일근린공원 조성에는 총사업비 69억이 투자되는데 그 중 19억이 민간자본이다. 공원조성은 3단계 (1단계:1988-91년, 2단계:1992-96년, 3단계:1997-2007년) 로 구분하여 사업을 추진하기로 되어 있다.
  • 강일동 지역은 대부분 농경지로서 주빈들도 대부분 농업종사자였다. 인근 고덕동, 상일동이 개발됨에 따라 함께 개발되기도 했으나, 아직도 도시 근교농업지역의 성격이 많이 남아 있어 인근 개발지역과 대조를 보인다. 인근 하남시 풍산동에는 제 1가나안 농군학교가 있어 농업지역으로서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또한 이 지역은 1967년 흥인동 및 서부이촌동의 철거민이 집단 이주하여 정착하고, 1968년에는 숭인동, 창신동의 화재민이 집단 이주하여 대부분 일일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저소득주민 밀집거주지역이기도 하다. 더욱이 1971년 7월 30일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되어 개발에 한계가 있었다.
  • 상일동 지역은 1982년 고덕지구 택지개발사업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서울 외곽의 전형적인 농촌으로 남아 있었다. 이곳에는 인근 강일동의 청송 심씨 마을과 함께 서울의 마지막 씨족마을이 있는데, 게네마을의 임씨와 동자골의 조씨 마을이다. 이들 씨족마을의 연중 대행사는 매년 9월에 지내는 치성제인데 강일동 지역에서는 음력 7월에 지낸다. 고덕동에도 함종 어씨 후손의 집성촌 남아 있다. 예전에는 농촌지역과 다름없는 빈촌에 불과하던 길동 지역은 1972년부터 개발되어 인구가 증가하고 아파트 밀집지역을 이루었으나, 그린벨트, 농경지 등이 남아 있어 지역 여건이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 예로부터 한강은 우리 민족의 젖줄로 역할하면서 민족서의 형성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로 인한 피해 또한 적지 않았는데, 홍수로 인한 피해가 가장 컸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에는 풍납동에서 왕십리까지 배로 다녀야할 만큼 피해가 컸다. 강동구의 성내천은 전장 12km로 유역 면적만도 66만평에 이른다.
    성내천은 평상시에는 물이 적지만, 하폭이 좁고 하상이 낮아 홍수가 나면 범람하기 쉬었다. 또 일단 범람하면 주변이 평야지대이기 때문에 피해가 상당하였다.
  • 이에 서울시에서는 1967년 12월 4일 민간자본 유치사업을 확정할 때 성내동의 한강방수축제사업을 유치하여 4천만원을 투자했다. 또 1984년에는 성내천 하구에 유수용량 41,600m 규모에 양수기 5대를 갖춘 성내 1배수펌프장을 만들었고, 1986년에는 성내교 하류에 성내 2배수펌프장을 건설했다. 또 61억 원의 예산을 들여 780마령 동력모터 8대와 5m의 제방을 쌓아 갑문을 설치했다.
  • 1960~70년대의 급속한 공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서울의 자연환경이 많이 파괴되었다. 50년대까지만 해도 한강의 얼음을 사용하고 낚시와 수영도 할 수 있었던 한강이 공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도시의 흉물로 변해갔다. 이에 총 사업비 4,133억 원을 투자한 한강종합개발사업이 1982년부터 착공되어 1986년에 준공되었다. 이 사업으로 36km에 이르는 저수로가 정비되고 10km에 이르는 제방이 축조되었으며, 13개의 한강시민공원과 행주대교에서 암사동에 이르는 36km의 올림픽대로가 완공되었다. 광진교 상류는 요트 및 수상스키장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각종 체육시설과 편의 시설들이 설치되어 시민들의 생활 건강에 이바지하고 있다.
  •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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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부서 : 문화예술과 문화관광팀 TEL : 02-3425-5250 수정일 : 2019-05-20 14:59:41